한우리_페미니즘 선언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를 담은 1960-70년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선언문을 담은 <페미니즘 선언>. 이 책은 소위 ‘미국판 메갈리안, 1960년대를 휩쓸던 거친 언니들에 관한 것이다(p14).’ 공유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았다고 울부짖고 애타게 찾으며 외쳐왔던 이들에게도 언제나 늘 역사가 존재했다. ‘내가 여기 있다. 우리는 드센 년들이다(p14).’라고 선언한 여성들의 목소리, 선언이 있다. 이 책은 대학 등 어디에서나 있었던 페미니즘이 공격의 대상이 된 2016년 전후 출간되었다. 이 선언문을 톺아보는 것이 매우 유효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 책의 선언문들이 쓰여 졌던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우리는 그때 한 공간에 모여 둥글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했다. ‘생리, 강간, 성폭력, 임신, 낙태... 대놓고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p17).’ 울고 화내고 웃으면서 서로를 지지하고, 함께 공분했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다른가? 하면 또 딱히 그러진 않은 것 같다. 안티 페미니즘의 공격적인 위협이 지지를 받고 젠더갈등이라는 헛소리로 이야기되는 세상에 페미니즘을 쥐고 오늘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페미니즘 이름 속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이들도 있다. 개인들의 고통이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정치적 조건에서 만들어진 억압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바꿔나가기 위해 거리에 서고, 발화한 여성들. 이것은 정치적 갈등이고,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외친 여자들. 동일임금 동일노동이 여전히 허공에 떠있기만 한 현실에서 래디컬 페미니즘 선언들은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 있다. 그리고 동시에 지닌 한계를 인식하며 그 이후/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역시도 생각하게 한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외침은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이 아닌 그 바깥에 선 이들을 치라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드센 년 선언문’을 읽으면서 좀 재미지기도 했다. 드센 년이란, 이런 특징이 있어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읽고 울며 아팠던 시기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내가 여성스럽지 않아 원치 않게 받아온 것들과 또 동시에 여성이기에 원치 않게 요구되어온 것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성인 내가 여성들에게 가진 미움이 가시들에 대해서. 그것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게 됨에, 그리고 나의 삶 모든 순간에 존재했던 여성들에게 감사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재밌고 다정한 ‘난 년’이 되어야겠다. ‘난 년’이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같이 걸어 나가면 더 신이 나 아주 재미날 테니까. 기꺼이 편애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서로를 긍정하고 스스로를 긍정하며 나아가겠다. 이 선언문을 읽으며 생각난 <킹콩걸>의 한 소절, 그 사랑해마지 않는 부분을 같이 기록해둔다.
‘그래서 지금, 잘 안 팔리는 삐딱한 여자들, 그러니까 박박 밀어버린 머리에 옷도 잘 못 입고 악취를 풍기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썩은 이뿌리를 드러내며 처세술이라고는 모르는 여자들, 남자에게 선물 한 번 못 받아본 여자들, 상대가 원한다면 아무와도 잠자리를 같이 할 여자들, 뚱뚱한 창녀들 혹은 어린 매춘부들, 언제나 질이 메말라 있는 여자들, 배가 나온 여자들,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들, 스스로를 남자라고 생각하는 여자들, 하드록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들, 동성에게만 흥미를 느끼는 여자들, 엉덩이가 비대한 여자들, 시커먼 털이 무성하게 나 있는데도 면도할 생각을 하지 않는 여자들, 거칠고 시끄럽고 지나치게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여자들, 포르노 여배우처럼 야한 옷을 입고 싶지만 너무 못생긴 여자들, 그러나 그게 부러워 죽겠다는 여자들, 남자 옷을 걸치고 수염을 단 채로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여자들,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칠 것이 없는 여자들, 콤플렉스가 많아 소심한 여자들, 절대 거절을 못하는 여자들, 감금 정도는 해야 말을 듣는 여자들, 공포심 혹은 동정심을 유발하는 여자들, 아니면 아무런 욕망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여자들, 피부는 늘어지고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해서 성형수술로 주름살도 펴고 지방흡입도 하고 코도 세우고 싶지만 돈이 없는 여자들, 남들과 너무 다른 여자들, 자기 자신 외에는 기댈 데가 없는 여자들, 항상 불안한 여자들, 아이들 문제로 골지 앓는 여자들, 바에서 땅바닥에 뻗을 때까지 술 마시기 좋아하는 여자들, 그리고 보호자가 되기를 원치 않거나 혹은 원하더라도 방법을 모르는 여자들, 싸울 줄 모르는 남자들, 잘 우는 남자들, 야망이나 경쟁심이 없으며 몸도 약하고 공격적이지도 않은 남자들, 겁 많고 소심하고 상처를 잘 받는 남자들, 바깥일 보다는 집안일에 더 취미가 있는 남자들, 가냘프고 털이 없으며 여자의 환심을 사기에는 너무 가난한 남자들, 누군가가 자신에게 기대를 걸거나 믿어주길 원치 않는 남자들, 밤에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들, 이런 남자들 때문에 더더욱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모르는 여자들...... 그런 여자들 편에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적인 여성이란 매혹적이되 천박하지 않고, 결혼 후에도 매력을 잃지 않으며, 사회적인 일을 하되 남자를 누를 만큼 너무 성공해서도 안 되고, 다이어트에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날씬해야 하며, 성형외과 의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영원히 젊음을 유지해야 하고, 잠자리 의무와 아이들 학교 숙제로 쉴 틈이 없어도 언제나 미소 짓는 엄마여야 하며, 가사를 훌륭하게 돌보되 하녀 같아서도 안 되고, 남자보다 덜 교양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우리의 코앞에 들이대며 본받도록 노력하라고 닦달하는, 그러나 내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이 행복한 여성이 사실 내 생각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P9-12).’
<페미니즘 선언: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 한우리 기획/번역, 현실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