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은실_양성애
길거리를 지나치면 아무렇지 않게 이성애자로 규정되고 판단될 세상에 나는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더 이상 이성애가 기본 전제가 되지 않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나의 삶이나 선택과는 무관하게 나는 언제나 더 많은 시선으로부터 이성애자로 읽힐 것이다. 그것은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이 사회의 ‘정상성’ 범주에서 벗어나는데? 라고 이른바 ‘티’가 난다고 사람들에게 쉬이 판단되는 이들의 삶과는 안온할지 모르나, 양성애-퀴어로서도 살아가는 곳곳의 순간이 상실이고, 어려움이라는 것을 언제나 안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존재는 한다. 그러나 또 나의 이 상실과 어려움은 이성애만을 껴안고 살아온 이들과는 나눠지기 종종 쉽지만은 않은 터라 레즈비언/바이 친구들과 나눠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끌어안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별 것 아닌 한낱 요금제에서도 올 수 있고, 팔짱끼기나 손잡기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온 몸에 박히는 것까지, 지칭하는 단어의 의미가 같더라도 다른 언어를 표기해야만 가능한 것들까지 다양하다. 그 다양함은 확장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주면서 때때로 동시적으로 비참과 고통을 쥐어주기도 한다.
남성을 사랑할 때와는 너무 다른 감정과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상실과 불안을 가졌던 시간이 있었다. 그건 나에게 올 불안과 알 수 없는 미래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불안과 알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면서 함께 오는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역시도 이성애 관계의 사람과도 또한 삶에서 다가오고 말 중/노년의 삶에 대한 고민을 갖지 않는 사람과도 쉬이 나누기 어려운 문제였다. 양/동성애, 비이성애는 그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안전하지 않은 것 투성이의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더 절벽 가까이 가게 되는가의 문제와 너무 쉽게 연결되곤 한다. 어떤 눈물은 쉽게 위로받지만, 어떤 눈물은 남들이 보이는 곳에서 떨어질 수조차 허용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살아간다는 것.
언젠가 친구가 물었다. 너는 왜 레즈비언이라 스스로를 말하지 않느냐고. 나는 그게 좀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성인 친구들이 여성인 파트너를 만날 때 자신을 이성애자나 양성애자보다는 동성애자로 인식하는 경향을 갖는다는 것을 느끼고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농담 섞인 의미로 나의 양성애자 정체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가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고,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냥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네,를 넘어서 어떤 의미들이 부여될 수 있고, 규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는지 잘 알았기 때문에 나 역시 웃으면서 받아칠 수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양성애에 대해 부정할 마음이 없다. 다만 나는 반드시 언제까지나 양성애자일거야, 라고 확신하지 않으며 그저 살아갈 뿐. 언젠가 내가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기 전의 어느 날들의 내가 그 순간 이후를 예상하지 못하며 살아왔듯이 앞으로 나의 인생에는 어떤 것들이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양성애/양성애자의 정의는 어렵다. 그리고 그 어려움 그대로 손바닥 위에 올려보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동그랗게 쥐고서 달려보기도 할 참이다. 깨뜨리지 않고 부수지 않고 잘 쥐고 가 볼 참이다. 모든 것이 명확히 들어맞지 않아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서 삐뚤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양성애: 열두 개의 퀴어 이야기>, 박이은실, 도서출판 여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