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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계급에 대해 말할 때

벨 훅스_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by 수수


나는 ‘계급’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되면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때의 나에게 너의 가난이, 너의 부모의 가난이, 그리고 네가 부모에 대한 죄책감이나 부채감이 너의 문제가 아니고 너의 몫으로만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해준 사람(들)을 처음 만났고, 나는 어깨를 짓누르던 부채감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이야기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고 싶어서 운동을 시작했다. 장시간 힘든 육체노동을 하고, 주야2교대를 하며 자고 싶을 때 자지 못하는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힘들게 번 임금을 아빠의 무엇으로 차압당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며 불안해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 붙어 있던 빨간 딱지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을 포기하거나 졸업을 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을 갖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가난하다. 아프고 가난하다. 아프고 나이 들어가고 있고 가난하다. 죄책감처럼 있던 부채감을 떨쳐낼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고 나 역시 가난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은 가난만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려가고 채워가는 또 다른 삶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만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운동을 하면서 페미니즘을 알았고, 나는 나아지지 않는 내 가난과 엄마의 가난에서 같은 경제적 계급과 자원을 보지만, 엄마가 딛고 올라가서 엄마가 갖지 못하고 나는 가진 사회정치적 자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전보다 더 많은 것들, 더 많은 기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개선할 전략을 배우지 못하고 그리하여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의 세계에 나의 엄마가 있다. 그리고 그러는 너는 뭐가 잘났냐, 싶게 그 가난이 세계에 나 역시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가난의 세계가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서 요즘 많이많이 생각한다. 내가 가진 자원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가 갖지 못하고 알지도 못할 자원에 대해서. 내가 지금 당장 손쓸 도리가 없다고 해도, 다른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으면서, 오늘도. 또한 가난만이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페미니즘을 만나고 다양한 관계를 만나고 세상을 만나면서 교차로에 선 연대의 얼굴을 알게 되었다. 돈만 있으면 이 고통이 없을 줄 알았던 과거의 나는 이제 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어떤 것들로 만나고 연대할 수 있는지를.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는 1장의 첫 글부터 내 마음을 흔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식구들과 복닥거리며 산 사람은 늘 자기 공간을 가졌던 사람과 소유권이나 사생활에 대한 개념이 상당히 다르다.’는 글은 읽으면서 나의 원가족을 생각했다. 나는 원가족과 살면서 한 번도 내 방이란 개념을 가져본 적이 없고, 부모가 이혼하기 전까지 같이 살았던 집에서는 한 번도 거실이란 개념의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늘 부모의 방과 나와 동생의 방으로 이루어진 집에서 살면서 부모의 방이 거실이자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으로서 자리했던 시절들. 제대로 된 욕실이란 개념이 없이 살았단 나의 글에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친구와 나는 너무나 다른 공간과 생활을 살아왔던 것이다. 사생활에 대한 개념 역시 그렇다. 이 한 문장을 읽고 나니 너무나 많은 것들이 생각나고, 내가 나 스스로를 너무 이해하게 되었다. 한 번도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 제대로 사생활의 공간이나 생활을 경험해본 적이 없던 나는 내 방과 거실이란 개념이 모두 있는 공간에 살면서도 거실에서 살거나, 사람들과 공유하고 같이 잠을 자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생각해보면,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이 생긴 그 원룸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이 없다. 나는 하나의 방이 나의 모든 공간인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리는 삶은 혼자보단 늘 ‘같이’의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같이’라는 것이 1인의 파트너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수 명의 친구들/사람들과의 함께 사는 거주 공간을 늘 염두 해 두었는데, 그것은 일정 부분 나의 가난으로부터 발현되었다. 나의 가난이 나를 방이 아닌 집에 살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 같은.


23년 전에 쓰인 벨 훅스의 글은 2023년을 살아가는 한국의 내가 읽어도 별반 낯설지가 않다. 계급 없는 사회로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벨훅스는 이야기했고, 페미니즘이 계급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해 썼다. 그러니까 이 글이, 그리고 내가 다르게 고민하고 놓지 않고 가져가고 싶은 것은 ‘페미니스트’로서 ‘계급’에 대해 말하고, ‘나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고,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가난과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과 직군과 질환과 또 수많은 정체성들 속에서 ‘나’라는 사람은 때론 뒤섞이고 때론 정돈되며 때론 어지럽고 때론 간결하게 살아갈텐데, 그 모든 것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밀리지 않고 내몰리지 않게, 그리고 또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애초에 인종차별은 없었다고 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는 누구나 노력하면 원하는 만큼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치며 계급 문제를 뒤로 밀어둔 한국 사회에서, 이제는 안티 페미니즘의 공격 속에서 세상이 이렇게 좋아졌는데 젠더/성 차별이 어디 있냐고 하는 한국 사회에서 말이다.


이 책의 ‘해제’를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는데, 두 가지를 기록해두고 싶다. 하나는 주거공동체에 살 때의 일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처지에 맞는 출자금을 내고 들어와 같은 돈의 월세를 내며 살았다. (나는 최소 단위 출자금을 내었고, 누군가는 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금액을 내었을 것이다. 또한 비거주자 역시 이 공동체를 지지하며 출자를 했다) 내가 살았던 2호집을 만들기 위해 1호집을 나왔던 00은 그 집에 가장 큰 방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짐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당연한 듯 그 집의 가장 큰 방을 내가 사용하게 해주었다. ‘해제’ 속 에피소드를 읽으며 그때의 생각이 났다. 비슷한 가치나 목표를 가지고 누군가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 했던 00에게 방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그 집에서 2년 동안 많은 돌봄과 안정과 배움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두 번째는 ‘N분의 일’이었다. 지금 내가 관계 맺고 있는 곁/친구들/선배들/동지들과의 시간 속에는 이 개념이 흐릿하게 존재한다. 늘 최저임금 노동자였던 나와 몇몇 사람들 대 대체로 학생이었던 사람들의 시절을 지나 (대체로) 모두가 임금노동자가 된 이후부터는 우리에게는 N분의 일의 개념이 오히려 도드라지지 않았다. 한때 최저임금은커녕 최소한의 활동비만을 받던 일을 하던 친구와 무엇을 할 때, 그가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도 배제되지 않도록 N분의 일에서 그의 몫을 제외하는데 모두가 동의해주었고, 그는 그것에 대해 유별나게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는 표현이 아닌 다른 방식의 돌봄과 애정을 나눠주었다. 우리 역시 그 행위에 유별나게 젠체하지 않고 서로가 할 수 있는 돌봄과 애정을 나누었다. 나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가난이란 개념은 어찌 보면 너무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어려움을 갖고 고민을 갖는 문제일 텐데도, 나의 가난이 그들과의 관계에서 배제가 되거나 문제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서로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돌봄을 주고받고, 다정을 쌓아가고 있다. 내가 가진 빚에 대해서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같이 걱정하고 고민해주었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 나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학비를 보태어주기도 했다. 나에게 늘 따뜻한 밥과 커피를 내어주며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아픈 몸을 걱정하며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운동 메이트가 되어주고, 잔소리꾼(?!)이 되어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삶은 누군가를 더 가난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사회정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게 해주면서도 가난에 대해 단일한 불행으로만 여기지 않고 지금 내 삶에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놓지 않게 해주는 동력이 된다. 나는 혼자 살아가고 있지 않다. 내가 가진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내가 가진 가난의 문제는 앞으로도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 많지만, 그럼에도 나는 혼자 살아가고 있지 않다. 다른 삶에 대해 상상하고, 살아가는 것. 가난해도 경멸당하지 않는 삶에 대해서, 그리고 그 가난이 끝내 나를 고립되고 외롭게 만들 것이라는 불안을 갖지 않을 수 있도록 나는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 다른 정와 새로 만들어진 보편 속에서 나는 모두와 안전하게 살고 싶다.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페미니즘이 계급에 대해 말할 때>, 벨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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