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수 Nov 28. 2023

감히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려나

여예람_감히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려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산문집, <감히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려나>. 사랑에 사랑이라 이름 붙이는 것, 부르는 것에 이이는 왜 ‘감히’라 말을 할까 궁금했다. ‘당신이 나에게 쏟아버린 그것을 감히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려나’로 시작하는 표지의 글을 소리 내어 음성 언어로 읽어보았다. 가질 수 있고,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꿈밖‘에 없던 이들이 존재하는 지금-여기의 ’꿈 밖‘을 상상해본다. 그걸 감히 상상한다 해도 되려나.


‘그때 나에겐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비밀이 있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한 사람을 좋아했다. 그걸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봐도 되려나.’는 문장을 읽는데, 오랜만에 그 사람 생각이 났다. 수 년을 마음에 두었던 누군가를. 아무도 모를 수 있었지만, 그리고 여전히 그때의 나만큼 그는 모를 수 있지만, 그에게 말했던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오랜만에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사실 사랑은 나란 사람이 매일 생각하고 담는 것이지만, 우정이나 인류애, 다수에 대함이 아닌 오롯함에 대해. 그러니까 누군지 특정할 수 없지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해 말이다.


목차에 쓰인 글의 제목들이 아름다워 어떤 글은 낭독하듯 읽었고, 몇 번을 목차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참 다정하구나, 내가 무어라고 함부로 확신할 수 없지만 여기 이 글들이 참 다정하단 것은 확신할 수 있다. 그건 나에게 이 글이 그렇게 다가온 것이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도 존재하겠으나, 그럼에도 나는 자신을 전혀 담지 않고 또 자신을 명백히 소외하는 글은 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사랑을 모든 각도에서 포착하’는 이의 글을 읽을 수 있어 기뻤다.


<감히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려나>, 여예람 산문, 어떤 마음 출판사


p10-11 같은 학교 다니며 쉬는 시간마다 만나 우리가 연인임을 전교생에게 알리는 거, 주말에는 인파 적은 곳을 골라 돌아다니며 조용히 데이트하는 거, 싸우고 나서도 등교와 하교는 꼭 같이하는 거, 꾸밈없이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편하게 지내는 거, 재미없다고 혹평이 자자한 영화를 보러가 그 영화의 장점 찾기 게임을 하는 거, 카페에서 음료를 시켜 놓고 얼음이 녹을 때까지 대화하는 거,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구성된 도시락을 싸 당신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거, 당신이 아플 때 밤새 당신 옆에 있어 주거나 당신에게 필요한 약을 사다 주 는 거… 이런 것들이 우리에겐 모조리 모조리 꿈이었다.

 그 꿈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한했다. 가고싶은 곳에 마음껏 갈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지 할 수 있었으며 갖고 싶은 것은 뭐든 가질 수 있었고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쓸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취향이고 이상형이며 사랑인, 우리가 매일 우리일 수 있는 세계에서.

 그렇게 꿈만 꾸다 꿈속에서 영영 헤어질 줄 알았던 우리는 어느 해 11월 고장난 가로등으로 가득한 공터에서 만났다. 내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일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p27 당신이 나에게 쏟아버린 그것을 감히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려나. 함부로 단정할 수도 형언할 수도 없는 걸 받아 버린 사람은 한동안 발화 능력을 잃어버린다.


p60 같은 맥락에서 엄마 반찬을 꺼내 먹는 일은 엄마가 나를 위해 따로 마련한 시간을 먹는 일 같다. 어떤 때는 반찬 맛보다 그 시간의 맛이 훨씬 좋다. 실제로 나는 그 시간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시간을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 웃기기도 한데 여전히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다정한 시간을 먹고 연명한다.


p76 어떤 사랑은 사람을 살리고 어떤 이별은 사람을 죽여요. 이제 이 이별 때문에 죽겠다큰 생각은 안 할 거예요. 아니 이 이별이 아무리 커져도 제가 더는 거기에 깔려 죽지 않을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선생님도 모르시겠죠. 어쩌면 아시려나.

 저녁은 드셨어요? 전 아까 집 와서 모처럼 떡볶이를 먹었어요. 예능 프로그램 보면서 떡볶이 먹느라 테이블 주변이 지저분해졌는데도 기분이 어지럽지 않았어요.


p97 한 사람 이야기를 일주일 내내 하면서도 그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자기 마음이 분명한 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다. 그 마음이 분명해지는 때를 우리가 어떻게 아나요.


p104 전혀 외롭지 않은데 혼자 살 때보다 부모님께 더 자주 연락한다. 들켜서는 안 되는 불안이나 불행이 더는 없기 때문인지. 남의 것이었다면 더럽다고 듣지도 않았을 변비 이야기가 이 사람 것일 때는 너무 재밌고 이 사람과 함께 겪는 실패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다. 잘못 구워 산산 조각 난 케이크가 밖에서 사 먹는 케이크보다 맛있다. 이 사람이 내 옆에 앉아 있으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땀 흘리지 않고 나를 소개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2023대구여성영화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