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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Mar 02. 2024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신성아_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은 아이의 소아암 발병에서 시작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치유기나 관해기, 투병기라고 말할 수 없다. 저자는 ‘시리도록 강렬하게 체험한 사건과 거기에서 파생된 감정과 사유, 성찰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랑의 복잡미묘한 지점과 그 안의 모순적인 부딪힘이 드러나기를, 정치와 사랑의 양립 가능성이 미미하나마 제시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일하는 여성-엄마인 저자는 아이의 질병으로 결국 일을 그만두고 돌봄의 주 담당자가 된다. 그는 일상의 돌봄이 아닌 아픈 이의 돌봄을 전담하면서 그제야 여전히 살아 있음을 뚜렷하게 내보인 ‘모성’의 ‘신화’에 반기를 들며 글을 쓴다. 매일 병원에서의 돌봄을 반복하면서도.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표지와 목차를 읽으며 마음이 서걱서걱 하면서도 단박에 좋아지는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마음에 드는 책을 들고 겨우 본문으로 입장했다가 아픈 몸의 서막을 알리는 글을 읽으며 손도 마음도 떨려와 책을 잠시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 한숨의 시간은 계속되었다. 우리 삶에 아픔은 언제나 올 수 있고, 누구나에게 올 수 있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지만, 아픔은 예고하며 준비된 자들에게 천천히 오지 않고 기습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암’이라는 공포를 자아내는 질병이 어린 아이에게 오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은 아이의 아픔에 엄마에게 전가되는 돌봄,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치부되는 몫, 나아가 중요한 권리이자 의제인 돌봄이 무시되고 지워지기 쉬운 사회의 문제, 사랑으로 시작됐을 결혼 관계 등 이성애 규범 속에서 존재하는 불평등한 관계, 무엇보다 그 하나하나의 잘못된 것을 함께 느끼지 못하여 그것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야 하는 구질구질함에 대해서.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의혹들, 이것이 왜 정치적인가에 대해서.


+ 대형 병원에서, 기피과에서 소아암 치료를 하는 저자는 지금의 전공의 파업에 맞물리는, 실은 오래전부터 문제제기 되어왔으나 변하지 않은 의료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심각한 지역별 의료 격차, 수가 인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 문제를 외면하는 정부, 지금 이 싸움에서 필수 의료 인력을 충원하고 공공의료를 확충하겠다는 모습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신성아 지음, 마티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신성아 지음, 마티


p13 얼마 지나지 않아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순식간에 죄책감이 차올랐다. 출생 당시 몸무게나 아이의 평소 병력은 자신 있게 답했다. 내심 뿌듯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아이 몸에 평소 멍이 자주 드는 편이었는지, 근래 배가 부풀진 않았는지 묻는데 내가 들어도 답이 궁색했다. 나를 닮아 멍이 잘 드는 체질이라고 여겼다거나 원래 종종 그랬다고 말하자니 하나뿐인 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엄마 같았다. 어떤 질문에는 얘가 과연 그랬었나 싶어 대답하기도 어려웠다. 나의 병력과 가족력을 묻는 질문에 지나치게 소상히 답하는 모습은 꼭 알리바이를 항변하는 용의자 꼴이었다.


p14 폭우가 내리는 한밤에 갑자기 집 밖으로 쫓겨난 기분이었다. 당연히 우리 셋 누구도 우산을 갖고 있지 않았다.


p15 한 명이 겨우 누울 좁은 침상과 그 옆의 바특한 보호자 공간이 우리 몫이었다. 침상과 침상 사이를 칼같이 가르는 커튼은 픽셀 단위로 공간을 구획하듯 매정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이렇게 한순간에 쪼그라들었다.


p17 무엇보다 마음껏 울 수 있는 곳이 절실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후, 한 번도 제대로 울지 않고 참았다. 조심스럽게 향후 일정을 알려주는 소아병동 전문 간호사 선생님 앞에서 주책맞게 울다가도 당장 수혈용 피를 구해야 하는 식이었다. 데우지도 못한 삼각김밥을 서둘러 먹는 것처럼 목에서 치미는 울음을 고대로 꿀꺽 삼켜야 했다.


p19 수전 손택의 유명한 비유처럼 우리 모두는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의 이중국적자다. 하지만 질병의 왕국으로 이주할 때 필요한 준비물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로 언젠가 질병의 왕국에서 사용할 본인의 여권을 한 번씩 들춰본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포스트 코로나 혹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느닷없이 질병의 왕국으로 이주할 이들을 위한 기본 매뉴얼이 절실하다.


p21 만 10세 미만이라 다행이라고는 했지만 필라델피아 염색체 양성 등 추후 이상 염색체가 확인되면 다시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고 했다. 사망률도 염두에 두고 매사에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10~20퍼센트의 불운을 떠올리는 순간, 나를 둘러싼 세계가 일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발 딛고 멀쩡히 서 있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아이와 나를 지키려면 저 잔인한 가능성은 의도적으로 배제해야 했다.


p39 아무도 나에게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발병 원인은 나한테서 찾는 것이 가장 쉬웠다.

 일하는 엄마라서 햄이나 소시지를 너무 자주 먹였다, 일하는 엄마라서 영상을 너무 많이 보여줘 전자파에 과도하게 노출시켰다, 일하는 엄마라 시간이 없어 아이를 매일같이 재촉하며 압박을 줬다, 일하는 엄마라서 아이의 정서를 세심하게 보살피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줬다, 일하는 엄마라서 아이의 이상징후를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 임신하고도 정신 못 차리고 체중 증가에 신경 쓰며 식단을 관리했다, 대학 때부터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염색체 이상 소인을 물려줬다 등등 아픈 아이를 낳고 기른 엄마의 잘못은 끝이 없었다. 가임여성이 된

2차 성징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살펴봐야 할 판이다. 원인을 모르니 절망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누가 재난을 초래했는지 알 수 없으니 복수할 대상도 없다. 결국 다시 엄마에게로, 나에게로 돌아온다.


p40 평소 아이의 컨디션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늦게 알아차렸다는 미안함도 지나치게 가혹한 자책이다. 윤이도 그랬지만 대다수의 소아암 전조 증상은 감기나 몸살, 성장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의 환아 엄마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듯 정말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엄마들이 자신을 탓한다. 수학여행 가던 딸을 진도 앞바다에 묻은 엄마는 딸 돌잔치에 새 명주실 대신 헌 명주실을 놓은 가난한 엄마라 딸을 먼저 보냈다고 통곡했다. 임신기간의 부주의함, 지나온 삶의 도덕성, 심지어 자신의 사주팔자까지 원망하는 것이 엄마다.


p42 꼭 나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남편과 통화하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올 때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한 여자의 사랑은 왜 항상 자기파괴적인가. 국가가 복지로 책임졌어야 할 돌봄이 가족에게 전가되고, 모든 가족구성원이 함께 나눴어야 할 책임은 사랑이라 불리며 여자에게 전가된다. 그렇게 여자의 사랑은 이름을 잃고 주인을 살해한다. 그 과정이 너무 가혹할 때는 운명이라고도 한다.


p49 우리가 이렇게 매일 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일대일의 관계, 둘 간의 사랑과 믿음, 온전히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관계의 역사, 이것은 모성이 아니다.


p55 모성애가 여성의 본능이라는 사이비 과학은 아주 오랫동안 여성의 희생을 연료 삼아 자기 발전을 거듭한 결과 모종의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성 신화는 반드시 헌신적인 돌봄을 전제로 한다. 영웅이 통과의례로 겪는 고난처럼 모성의 서사는 돌봄의 고통 없이 완결될 수 없다.

 그러나 돌봄은 모성에서 뿌리내린 것이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성은 돌봄으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잘 돌본다는 이유만으로 숭고한 모성의 담지자나 영웅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돌봄을 거부한다고 해서 섣부른 판단의 대상이 될 이유도 없다. 모성 신화는 여성에게 손쉽게 희생을 강요하는 동시에, 각 여성의 삶이 지닌 복잡하고 특별한 경험을 일거에 삭제한다. 저마다 다른 엄마들의 삶을 워킹맘과 전업맘으로 양분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지독히 안일하고 편협하다.


p67-68 가장 질투가 난 사람은 남편이었다. 나는 이렇게 좌초하는데 그는, 적어도 직업인으로서의 그는 혼자 구명정을 탄 듯 건재해 보였다. 심지어 그는 병원비 생각해서 일을 더 열심히 하라는 주위의 독려도 듣고 있었다. 이제 윤이 곁에 엄마가 있으니 사업에만 집중할 수 있겠다는 응원도 들었다. 아이를 위해서 돈을 벌라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야근에 주말 근무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직장에 헌신하고 승진해서 급여를 늘리라면 기꺼이 그럴 수 있었다. 그래도 돈이 부족하면 주말에 아르바이트라도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내게 그러라고 하지 않았다. 부양과 돌봄 중 선택할 권리가 내게는 한 번도 주어진 적 없었다. 이 비상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이름과 직책이 불리고, 아이가 아닌 다른 것에 몰입할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p74-75 이렇듯 돌봄은 훌륭하고 창의적인 일이다. 돌봄은 본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이지 않으면 누군가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 여성, 특히 엄마의 타고난 기질이나 의무로만 여기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여성이 지금껏 훌륭하게 수행해온 일이자 성과로서 이제라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리베카 솔넛이 "비존재"라고 명명한 여성들의 부재,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일을 더 이상 부정해서는 안 된다.


p76 그래서 나는 내가 병원에서 하는 이 행위를, 나 말고 다른 많은 보호자들이 시시포스가 돌을 굴리듯 매일 하는 이 과업을, 차마 돌봄 ‘노동'이라고 부르지 못하겠다. 노동이라고 하자면 이 일은 착취의 강도가 너무 심하고, 노동자의 소외는 정점에 이른다. 이보다 악질적인 노동조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지, 혹은 더 이상 눈감고 귀 닫기 어려웠는지 이제 시장은 돌봄에 다른 여성 노동자를 소환한다. 딸이나 며느리에게 의지하는 대신 중국인 간병인을 부르고,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해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 든다.


p7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새 한국 여자들은 도통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중국 여자들에게 돌봄을 맡길 수밖에 없다"라는 이 해괴한 논리가 사회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그렇게 한국 여성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중국 여성은 착취의 대상이 된다.


p79 여성은 당연히 남성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존재라고 정부가 앞장서서 대상화하고 있다. 김치녀, 신도시맘, 맘충, 김여사, 돼지엄마같은 유령들은 바로 이런 편견을 먹고 자라며 실체를 얻는다. 급전직하하는 출산율 문제를 해결하려면 왜 여성들이 결혼을, 출산을 하지 않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농촌 남성이 결혼을 못하거나, 구직 중인 남성청년이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들 걱정하면서 왜 여성은 단 한 번도 연애나 결혼의 주체로 상정하지 않는 것인가.


p86 아무도 나를 두고 '엄마는 우리 가족을 위해 돈 버느라 많이 바빠'라든가 '엄마에게 중요한 시기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자'라고 아이에게 변호해주지 않았다.


p99-100 그는 알아야 했다. 그를 비롯해 이 시대 남자들의 돌봄에는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언어는 천편일률적이고, 현실을 외면한 채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그것은 키치다


p101-102 저마다 형태가 다른 가족이라는 입체도형 안에서 사랑은 고정되지 않고 부유한다. 그 성분이나 입자는 대개 돌봄일 것이다. 남편에게 숱하게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사랑=돌봄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이와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부부 사이에서도, 차츰 확장하는 가족의 틀 안에서 서로를 돌봐주고 돌봄받기를 기대한다. 승패가 나지 않는 이 지난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여전히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사랑이 키치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안 그래도 부유하는 사랑을 부러 뒤흔들고 의혹을 제기하며 이를 정치라고 부르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106 논란은 자연스레 전업맘이 왜 돌봄교실을 신청하냐는 비난, 그리고 내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돌봄교실을 왜 워킹맘만 활용해 그 가정의 수입만 늘려주냐는 반박으로 이어졌다. 애초에 직장이 있는 엄마든, 직장이 없는 엄마든 혹은 아이가 둘이든 셋이든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무슨 자격 요건이 따로 있겠는가. 개인이 처한 조건과 사정에 상관없이 무조건 아이 수와 재직 여부로 서비스 수급에 차등을 둔다는 것은 여성에게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는 말이다. 부불노동으로 애를 키우거나, 가불 노동으로 소득세를 납부하거나. 보편복지를 포기한 국가의 무신경한 정책 집행은 이렇게 여성을 편 가른다.


p126 엄마나 아빠가 부족해서 가족이 흔들리는 게 아니다. 이상적인 가정이 불가능한 근본적인 원인은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의 불완전성, 그리고 돌봄을 오로지 개인에게 떠맡기는 사회 구조에 있다. 남편이 돌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가 실은 더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그 구조를 바꿔내지 않으면 아내도, 남편도, 무엇보다 아이들도 영원히 피해자 위치에 머물게 된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늘어나는 이 유독한 시스템은 가계를 통해 대를 잇는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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