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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Mar 03. 2024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_전쟁 같은 맛

엄마의 조현병 경험 그리고 발현 이후 미국에서 정착하기 전, 한국에서 기지촌 성매매 경험 여성이었다는 걸 알게된 저자가 엄마의 삶의 서사를 되짚는, 회고록 <전쟁의 맛>. 저자의 엄마 ‘군자‘씨는 한국전쟁을 경험하며 가족과 흩어졌었고, 가난의 한가운데 놓여 생존하기도 했다. 이후 그 생존은 ’기지촌 여성‘으로 변화했고, 그녀는 그 속에서 비-결혼 상태로 ’혼혈아’인 아들을 출산하며 명백히 존재하는 차별과 구분 속에서 살았다. 역시 미군이 있어 만남이 가능했던 남편(저자의 아버지)을 만나 저자를 출산하고, 미국으로 이주하나 그 이주는 사람들이 흔히 머리에 그리듯 ‘아메리카 드림’만이지 않았으며 저자 역시 백인이 거의 백프로 존재하던 곳에서 각종 차별의 언어에 놓이며 자라났다.


그러다 엄마가 발병했으나 오랜 시간동안 인식되지 못했고,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녀의 조현병의 발생 근원은 무엇이며 어디인가. 저자는 그것을 파헤쳐가는, 이 회고록을 완성했다. 가난, 분리, 전쟁, 생존, 폭력의 트라우마 속에서 ‘군자’는 어떻게 살아내왔고 버텨왔는가. 그리고 그에게 온 ‘조현병‘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그에게 조현병은 중요한 정체성이겠으나, 그를 조현병으로만 담을 순 없기에. 글의 과정은 나쁜 기억/경험, 수치의 것이라 여겨졌던 것을 다시 해석하며 의미를 바꿔가는 과정이었고.


어쩌면 저자는 평생 성매매/성노동(물론 이것은 페미니즘 영향으로 제외일 수 있으나), 그보다 더 들어가 미군이 전쟁에서 보인 행태나 ‘위안‘의 여성들 그러니까 기지촌 생활이나 일본군 ’위안부‘ 등 전쟁과 식민지, 성의 자원화와 폭력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연구 주제가 될 일 없이 살아갔을지도 모르나, 그는 그 주제에 붙잡게 되었고 이는 자신과는 다르다고 여겨졌을 엄마의 경험과 이주가 또 어떻게 ’나‘와 연결되고 이어지는지를 쫓는 과정이기도 했을 거라 생각들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원하는/쓰고 싶은, 아니 그보다는 그 쓰기에 있어 부러워하는 회고록이기도 했다. 나는 나와 엄마와 나를 엮는/연결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그런 의미에서 좋아하는 책들이 있다. <하틀랜드>나  <랭스로 되돌아가다>와 같은. 그 안에 이 책도 들어갈 것이다.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글항아리


p7-8 한때 한국은 어머니의 보금자리였지만, 혼혈 자녀를 두게 된 어머니는 인종화된 우리 몸 때문 에 당신의 과거를 감출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주변부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했다. 이런 연유로 혼혈 자녀를 둔 많은 여성이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는 집단을 퇴출한다는 전후 한국의 국가적 의제를 떠맡은 사회복지사들의 압력에 못 이겨 자녀를 국제 입양 보냈다는 사실을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혼혈 아동을 한국 국적자에서 배제하는 국가 정책과 우리 어머니들에 대한 지독한 사회적 낙인 때문에 한국에서 추방 당했던 것이다.


p9 하지만 한국 땅에서 멀어지고 수십 년 동안 그곳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한국어를 잊었다. 언어를 잃으면서 친밀감 또한 잃었고, 나는 나 자신에게서도 소외되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한국에 남겨두고 온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기에, 그분이 병을 얻자 나를 한국의 가족과 묶어주는 끈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 없이 내가 어떻게 한국에 갈 수 있 을까? 누가 내 말을 통역해줄까?


p34 “이름 때문에. 그 이름이 싫어."

 ”왜요? 이름이 뭔데?

 “시클라멘cyclamen. 사이클Cycle[순환)같이 들리잖아." 엄마는 마치 역겹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다시 말을 이으면서는 울먹이는 듯했다. "똑같은 일이 계속 계속 반복되는 거 지긋지긋해. 뭔가 변화가 있으면 좋겠어."

 악순환. 폭력의 순환. 내 연구와 우리 가족사에 대한 상상으로 마음속에서 저절로 자유연상이 되었다.


p35 나는 발코니를 내다보며 시클라멘을, 사이클을 회상했다.

 아마 엄마가 말했던 사이클이란, 허락된 만큼만 최소한으로 움직이며 내핍한 생활을 해야 했던 당신의 외로운 하루를 가리켰는지도 모른다.


p64 미군 기지 주변에는 바와 나이트클럽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병사들은 여성의 손길에 위안받았다. 연예인 지망생들은 노래 부르고 춤을 췄다. 예쁜 소녀들은 바에서 음료 값의 일부를 벌이로 받으면서 음료를 팔고 남자들과 얘기를 나눴다. 한국인들은 남은 음식을 구걸하거나 쓰레기통에서 턱찌꺼기를 찾겠다고 삼삼오오 기지로 몰려갔다. 어떤 여성들에게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걸 구하다가 서비스를 먹을 것과 교환하게 된 건 그저 작은 변화에 불과했다. 식사 한 끼와 섹스를 교환하는 것. 음식을 암 시장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다시 더 많은 음식을 사는 것. 음식보다 더 비싼 것을 사기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성을 파는 것. 날마다 쌓여가는 빚더미 아래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한 일들 이었다.


p66 미군 주둔으로 한국이 얻는 이익은 상당해서, 당국은 기지촌 성산업을 "외화벌이"의 일환으로 적극 홍보했지만, 정작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점차 권리를 박탈당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 여성들에 대한 낙인은 너무나도 심각해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게 더 이상 불가능할 정도였다. 아버지들은 딸이 일해서 번 돈으로 가계 빚을 갚았으면서도 그 딸을 호적에서 파냈다. 일부 여성은 학대자 손에 목숨까지 잃었지만, 이 남성들은 제대로 재판도 받지 않았다.

 미국의 유혹은 기지촌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가렸다. 치외 법권의 보호를 받는 술 취한 군인들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클럽 주인들이 말 안 듣는 여자들에게 깡패를 보낸다는 것을. 기지촌 여자들이 낳은 아이는 무국적자가 되리라는 것을 이 여자들이 곧 늪에 빠질 거라는 것, 죽음 아니면 미국인과의 결혼을 통해서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는 것을.


p97 엄마는 조현병을 앓지 않아도 됐다.

 나는 이 사실을 항상 뼛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과학적 증거 없이는 그런 주장을 적법하게 펼칠 수 없었다.


p108 미국 생활을 한 지 3년 반이 다 되었지만 엄마는 텔레비전에 나오든 말든 요리사가 존경할 만한 직업이라는 생각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요리는 가정주부의 일이자 노동계급의 일이었고, 그 두 조건은 살면서 엄마의 지위를 크게 좌지우지했다. 이 말을 할 때 엄마가 칼을 들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얄궂게도 엄마는 틀림없이 요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p112-113 외가 식구들 중 아들한텐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하는 특권이 주어졌지만,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는 남자를 위해 봉사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배웠다. 엄마는 봉사하고 희 생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당신이 가질 수 없게 된다면, 아이만은 반드시 가질 수 있게 하겠다고 엄마는 생각했다. 내 성공은 엄마가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요, 내 교육은 엄마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라는 것, 그걸 깨닫는 데 평생이 걸렸다.


p163 새로 입양된 아이는 거의 열일곱 살이 다 된 나이였고, 유일하게 한국 이름을 유지했다. 입양 부모는 새로운 정체성에 적응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그 여자애의 미나라는 이름이 미국 이름으로 들릴 수도 있을 법한 이름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엄마가 주장한 대로 이 가족의 본심이 미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삼는 게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그 인간들은 애를 한 명 더 원한 게 아니야! 식모를 원한 거지!" 엄마는 울면서 말했다. 다시금 엄마는 그 아이의 고통을 절절히 느꼈다.


p264 라파엘은 내 다른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는데, 특히 브라질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는 샌드라와 친해졌다. 나는 마침내 내 공동체를 찾아냈다는 데 안도했고, 어마어마한 성취감도 느꼈다. 라파엘은 내가 단순히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접착제”라고 했다. 너는 늘 사람들을 모이게 하잖아. 라파엘은 내가 선택한 가족이 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 내 아들은 그를 라파 삼촌이라 부르게 될 것이었다.


p266-267 아버지와 이런 논쟁을 하면서, 나는 그분이 멸시하는 타자에 나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우정이나 연애 감정에 있어서도 '제3세계'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끌렸다. 우리 사이에서도 제3세계라는 말이 적절한 용어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말이다. '개발도상국'이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 용어가 되면서 '제 3세계 국가'를 대체했지만, '제3세계'라는 말에는 국가와 민족 간 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상기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여기에는 유럽의 식민 국가 출신일지라도 사회경제적으로 힘이 밀리는 이민자 집단 역시 포함되었다.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는 포르투갈 이민자도 여기에 속했다. 이들은 청소노동자나 식당 직원이 아니고서는 아이비리그 캠퍼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소수 언어 커뮤니티였다. 나는 점점 더 의식화되었고, 스스로를 식민지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p272 아버지는 당신이 아시아를 왕래할 수 있었던 기회가 미군의 미군이 점령한 나라 간의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관계에서 왔다는 사실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필리핀, 괌, 오키나와, 한국에서 지낼 수 있었던 건 그곳에 있는 미군 기지 때문이었고, 미군을 지원하는 선원 역할을 하며 군의 일원으로 여겨졌던 아 버지에겐 현지 여성을 접할 공식적인 기회를 비롯해 각종 특권이 주어졌다. 우리 엄마 같은 현지 여성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도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p274 대학생인 때는 아버지의 편협함이 용서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가 속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 일생에서 대부분의 시간 퀴어 섹슈얼리티는 도덕적인 결함이자 범죄, 또는 질병으로 취급되었다. 워싱턴 주에서 동성 간 성행위는 1976년까지 불법이었고,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도 1980년까지 동성애를 정신 장애로 분류했으며, 1990년까지는 동성애를 근거로 미국 이민이 거부될 수도 있었다.


p302-303 2009년 1월 7일 『뉴욕 타임스」는 수십 년간의 침묵을 깨고 미국인을 위한 성매매 업소를 조성하는 데 한국 정부가 한 역할을 밝힌 전직 성매매 여성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그중 한 명은 “우리 정부는 미군을 위한 포주였다"라고 말했다. 목소리를 내는 여성의 수는 점점 늘었고, 120명의 여성이 한국 정부가 수천 명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세 명의 판사로 구성된 재판부는 원고 중 57명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엄마가 기지촌에서 일했던 시기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군을 상대로 일했던 여성들이었다. 재판부는 국가 기관이 여성들을 창문이 막힌 방에 불법으로 격리 수용하고 성병 치료를 강제한 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위법행위일 뿐 아니라 다시 되풀이되어서도 안 될 중대한 인권 침해'라고 판결했다."


p320 엄마에게 베이킹은 미국인이 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망각의 방법이었다.


p324 또 성별을 막문하고 사람들이 ‘창녀’나 ‘걸레’ 같은 욕을 툭하면 무심코 사용하는 방식을, 그리고 이러한 모욕이 대중문화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거기서 내 의문이 시작되었다. 엄마가 느낀 자기 가치에 대한 감각은 그런 낙인과 얼마만큼 연관되어 있을까? 도를 넘은 수치심이 엄마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때 비로소 나는 왜 내 교육이 엄마에게 그토록 중요했는지 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학자가 되고 싶었던 당신의 꿈을 나를 통해 대리 실현하려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당신이 직면해야 했던 것과 다른 선택지를 내가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p326 나는 필리핀 성노동자 활동가인 아둘 드 리언의 말을 되고 또 되씹었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성매매가 자유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를 두고 싸우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다. 우리 제3세계 국가 출신 여성들에게 그들의 싸움은 지루할 때로 지루해졌다. 성매매를 둘러싼 우리 문제는 그들의 것과 다르다." 우리에게는 "매춘부가 되지 않기로 할 권리”를 확보하는 게 더 시급한 문제다.

 아이러니하게도 첫 책이 출간되고 몇 년이 지난 후, 내가 한국 기지촌 여성들이 자기 '선택'으로 성매매 여성이 되었다고 묘사했다는 비판의 이메일을 받았다. 이들이 '강제로' 그렇게 되었 다고 묘사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선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하는 답장을 보냈다. 내 글에서 논하는 사회적 맥락상 '선택'이란 개념을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외국군을 접대하기 위해 성노동을 조직할 때, 또한 양국 관계가 심히 불평동 할 때, 그 노동 조건은 이미 강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군을 상대했던 성노동자 대다수가 사기를 당하거나 인신매매를 당한 건 아닐지 몰라도, 이들에게 다른 이렇다 할 선택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p414-415 광기에 대한 오해와 여성에게 강요되는 침묵에 대해 이렇게나 오랫동안 고민해온 나에게, 이 백인 남교수는 학계에 있을 게 아니라 우리 엄마처럼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연구실에서 연구계획서 심사 중 벌어진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퍼트리샤 선생님은 다른 사회학자들이 어처구니없다면서 실소했다. "그 사람들은 네가 유령 수를 세어야 한다고 생각해." 세대를 넘어 현현하는 유령을 양적 접근으로 정량화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선생님은 후회도 내비쳤다."내가 너를 이러게끔 부추긴 건 맞지만, 그러면서도 네가 내 말을 들을 줄은 몰랐어." 선생님이 뻣뻣한 검은 머리를 두 손으로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선생님 말대로 해서 전 좋은걸요!" 주변부를 가장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준 분이 선생님이라는 걸 상기시키며, 나는 패기 있게 말했다. "저는 꽉 막힌 사회학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학계에 남고 싶지도 않고요."

 내가 오랫동안 페이스트리 셰프로의 커리어를 꿈꾸었기에, 퍼트리샤 선생님은 걱정을 하곤 했다. "그레이스, 우리 이러다 케이크한테 너 빼앗기는 거 아냐?" 선생님은 내가 대학원에 온 게 사회학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끝을 모를 만큼 깊은 트라우마의 유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음식을 먹이려고, 또 과거를 직면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내내 나의 지도교수였고, 이 모든 것이 내 박사 논문과 연결되어 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p435 “네…… 엄마한테 오랫동안 얘기하고 싶었어요……엄마한테서, 엄마 인생에서 영감을 얻은 거예요." 나는 논문에 대해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양공주'라는 단어에 이르자 엄마가 끼어들었다.

 ”오, 그건 나쁜 말이야." 엄마가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쓰여온 건 알지만, 내가 글쓰기를 통해 그 의미를 바꾸려고 해요. 그 단어가 더 이상 수치스러운 말이 아니었으면 해요. 그 여자, 나한테는 영웅이니까." 내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가 이제까지 했던 어떤 일에 대해서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요. 나는 엄마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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