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클레어_눈부시게 불완전한
일라이 클레어, <눈부시게 불완전한>은 자신에게 내려진 진단명과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치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정상성’의 함의에 저항한다. 장애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고쳐져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사람들의 인식뿐 아니라 법과 제도에서도 그러했던 것은 장애란 비정상적이고, 문젯거리로 규정되고 명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리 사회는 비장애중심주의, 이성애규범, 인종차별주의 등을 정상이라 명명하고 있다. 장애란 것이 무조건적으로 고쳐지고 박멸해야 하는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그대로 수용되고, 인정되어야 함을 일라이 클레어는 말하고 있다. 일라이 클레어가 말했듯 그는 치료를 모두 거부하자고 하거나 단순히 치유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를 둘러싸고 있는 이해관계와 권력관계에 대해 톺아보며 좀 다르게 생각해보는 건 어때? 제안한다. 양 극단의 장애냐 비장애냐, 정상이냐 비정상인가가 아니라 그 사이 무수한 차이들과 각자의 모양과 삶의 방식들에 대해 포착하면서.
<눈부시게 불완전한>에서는 ‘치유’에 대해 뜯어본다. 우리 사회가 무엇을 문제라고 규정하고 명명하며 그 문제의 상태를 없애기 위해서 ‘치유’라는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행했는지, ‘치유 이데올로기’ 속에서 가해지고 있는 ‘치유’라는 늬앙스, ‘치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치유’가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어떤 구조를 가지며 무엇과 공모하여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런 ‘치유’는 어떤 영향을 가지는지, 즉 ‘치유’가 ‘정상성’의 강력한 기제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일라이 클레어는 파헤친다. 현존하는 장애를 치워져야 할, 없어져야 할 것으로 여기고 의료기술과 과학기술 및 비의료적 영역 등 모든 영역에서 온갖 것이 들러붙는 ‘치유’의 방식은 장애의 현재를 지우고 감춰버린다.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김은정이 말한 ‘접힌 시간성’처럼 현재를 지우고 과거와 장애가 없어질 거라 믿는, 아직 오지 않는 미래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1장 ‘치유라는 이데올로기’는 치유라는 것이 사회의 정상성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며 장애/질병을 문제됨으로 규정하고 명명하여 제거하고 박멸하고자 하는 목표를 지닌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애가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비장애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곳곳에서 발화하며 손상된-지금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일라이 클레어는 본래의 비장애 상태가 무엇인가? 질문을 한다. 본래가 손상=장애였던 이라면 그에게 돌아가는 본래적 비장애 상태는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치유는 본래 정상적인 비장애만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건네지 않고, 듣지 않는다. 치유는 그냥 이야기를 한다, 일방적으로. 2장 ‘치유라는 폭력’에서는 이러한 치유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치유라는 이름으로 제거하고 전환하고 박멸하는 과정이 폭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치유의 핵심은 언제나 제거이기 때문이며, 치유가 모든 것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3장 ‘치유와 공모하는’에서는 시설 이야기가 나온다. ‘페어뷰훈련센터’ 사례가 나오는데, 이곳은 전형적인 시설로서 수 천명의 사람들을 수용하고, 많은 경우 평생을 그곳에 ‘갇혀 산다.’ 일레어 클레어는 “진단은 사실이기보다는 도구이고, 존재의 양태라기보다는 행위이며,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4장 ‘치유라는 늬앙스’는 우리 사회가 비장애중심주의를 중점으로 삼으며 무엇을 어떻게 배제하는지 담고 있다. 특히 이 장에서는 환경을 이야기하면서 장애를 동원하는 사례를 들어 비장애중심주의를 이용하여 장애의 박멸을 정의와 결합한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방식은 “눈부시게 불완전한” 우리의 삶을 못 본 체 하는 것이며, 환경에 위협이 된다고 문제시 되는 것과 같이 부자연스러운 존재로 공표되는 것이라고. 5장 ‘치유의 구조’는 의료산업복합체가 어떻게 문제인 치유대상을 규정하고 명명하는지, 또한 그 구조에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뒤엉키고 기업뿐 아니라 공적기관과 사적기관들이 서로 맞물려 얼마나 빽빽한 숲과 같은지를 드러낸다.
6장 ‘치유가 작동하는 법’은 ‘정상’이란 것을 하나로 그리고 한 가지 방법만을 정답이라 여길 때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치유에 대해 말한다. 덜 아프기를 바라는 욕망이 언제나 그것을 없애고자 하는 박멸의 치유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언제나 치유는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욕망되고, 줄곧 약속한다. 비록 그것이 지켜지지 않더라도. 질병이나 장애의 ‘종식’을 위한 연구와 노력들은 분명 많은 생명을 구했고, 죽음과 직결되는 병에서의 변화도 만들어냈다. 그것을 일라이 클레어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의 약속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의 부정이나 평가 절하들에 대해 미래를 위해 참아도 좋고, 외면해도 좋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짚고 있는 것이다.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현재의 변화를 만들어 내야하는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치유만이 아니라 접근성, 차별, 고립, 시설화 문제에 변화를 만들어 내는. 치유는 현재를 지우고, 과거를 안고 미래에 초점을 맞추며 작동한다.
7장 ‘치유의 한가운데’에서는 강제단종과 강제수용의 벅 대 벨 사건, 인종순결법, 케이스 파일로 축소된 삶들로 치부되는 수용시설의 사람들(몰리의 이야기), 흑인들, 백인 장애인들, 식인종이라 불리고 동물원에 전시된 중앙아프리카 선주민, 그리고 저자의 강간 경험과 정신분열에 대해 이어지면서 치유의 한가운데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남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일라이 클레어는 8장 ‘치유를 누비기’에서 비장애중심 사회에서 보여 지는 비장애 동일성에서 ‘단일재배’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주로 거대한 플랜테이션으로 운영되는 단일재배는 자연스러움이 아니다. 특정 이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폭력과 제거, 박멸과 함께 시작됐다. 거대한 옥수수 밭을 누비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치유를 누비는 것과도 같을 수 있다. 과학기술이 말한 박멸과 폭력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곳. 한편으로 치유를 누빈다는 것은 치유되어야 할 것이 장애가 아니라 비장애중심의 지금-여기의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라면 그 사회를 치유되지 않는 몸-마음으로 누빈다는 의미 역시 될 것이다.
9장 ‘치유의 영향’에서는 애슐리 사례와 그에 대한 일라이 클레어의 비판이 담겨 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질 어떤 가능성을 지워버린 가족. ‘어떤 아버지가 장애인인 딸의 몸-마음을 수술과 호르몬으로 완전히 뜯어고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라이 클레어는 “사랑은 역사를 지우지 않”는다고 그 사랑에 대해 문제제기 한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성을 가치와 인격성의 지표로 사용하며 똑똑하다는 것을 보이려 해온 경험을 이야기하며, 지성의 옹호가 아니라 저항을 이야기한다. 지성을 옹호하며 지적장애인과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쪽으로 이동하여 능동적인 연대를 실천하자고, 그래야 지성이 무기로 사용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된다면 그 이유로 누군가를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한쪽으로 치워버리려는 시도 역시 당연시 될 수 없을 것이다. 치유는 그가 누가 됐건 유혹적인 확언을 마주하게 한다(10장, ‘치유의 약속’). ‘우리는 수많은 필요와 욕망을 가진 의료산업 복합체 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치유의 약속과 상호 작용을’ 하지만, 치유는 나의 몸-마음 갈망만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정상성으로 밀어붙인다. 치유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장애는 곧잘 수치심을 갖게 했다. 일라이 클레어는 ‘고립감, 쓸쓸함, 위로할 길이 없는, 틀렸다는 감각’의 수치심 속에서도 그것을 ‘꺼내서 그리고, 쓰고, 춤추고, 구르고, 노래하고, 더듬거리고, 신호를 보내고, 울고, 웃고, 싸웠으면 좋겠다. 집회를 조직하고, 인도에 분필로 구호를 쓰고, 친구와 애인, 파트너, 가족들과 대화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서로의 아름다움과 강함을 회복력을 상기했으면 좋겠다.’고 썼다. 살아 있기로 약속하면서.
일라이 클레어는 말한다. 치료제의 부재가 자신을 분명한 존재로 만든다고. 눈부시게 불완전함으로 가는 문을 열어젖힌다고. 눈부시게 불완전한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시의 몸-마음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자신의 정치 삼는다. 눈부시게 불완전한 그는 저항하고 고발하고 기록하고 애도하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