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와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예전에 읽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게 오래되어서 처음인 듯 읽어나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초반부를 읽으면서 사강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이입한 것일까? 물음표가 생겼다. 시몽에게 이입했을까, 아니면 폴일까, 어쩌면 로제일까. 시몽이 예전에 사귀었다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여성을 묘사할 때 사강이 생각나서 자신과는 다른 이미지로 시몽을 그리고 이입한 걸까? 혹은 자유를 중요시하는, 독한 ‘골루아즈 담배’를 피워대는 로제에게 자신을 이입한 것일까? 혹은 전혀 사강 같지 않아 보이지만, 차츰 어쩌면 그 애착과 그 농밀한 외로움을 해소하지 못한 것이 폴이 사강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세 인물에서 나는 조금씩 사강을 상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자꾸 내 머릿속에는 ‘폴리아모리’가 따라 붙었는데, 이 세 인물의 관계가 폴리아모리적이어서라기 보단 오히려 너무 그렇지 못해서였다. 이들을 보며 암묵적으로 사회에서 연인에게 주어지는 독점적 소유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집착, 불평등, 비-물리적 폭력, 외로움, 고통, 불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홍승은은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를 통해 혼자여도 안전하게 잘 걸어 나갈 수 있는 삶의 토대가 만들어져야 평등한 관계도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며 ‘언젠가부터 나에게 폴리아모리는 다자 간 연애만을 주장하는 사랑법이 아니게 되었다.’고 했는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가 어디 있겠냐만 여하튼 단순히 다자연애가 아니라 연애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그 관계를 안전하고 평등하게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해가는 ‘비독점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지 않아 고통스러운, ‘서로의 몸과 마음의 안녕을 돌보는 일’(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을 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서 말이다.
사강은 믿는 건 사랑이 아니라 열정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열정이 끝이 나면 사랑(하는) 관계는 무엇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사랑도 그대로 끝인 걸까. 혹은 긴장과 조바심으로 공간을 차지하는 관계에서의 사랑은 사랑이고, 열정일까. ‘로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자기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었다. 그가 확신하는 유일한 것은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폴의 사랑이었고 몇 년 전부터 그녀에게 집착해 온 자기 자신의 마음뿐이었다.’ 나는 로제를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고 자기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는 이가 나 아닌 다른 사람, 폴의 사랑은 부술 수 없는 것으로 유일하게 확신하고 있다니. 그리고 폴에게 집착해온 자기의 마음은 확신한다니.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자가 모순적이게도 확신하는 집착의 마음은 무엇이람. 나는 그런 로제의 태도에서 폴을 존중한다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앞서 홍승은은 같은 책에서 전 연애들에서 권태를 느끼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감정노동들을 하지 않게 되면서 ‘서로를 당연하게 여겼고, 그래서 자주 무례해졌다’고 했는데, 우리가 분명히 목도했다고 믿는 열정에 기대어 용인해선 안 되는 무례함을 사랑이겠거니 당연한 듯 넘기면 사랑은 사라지고 만다.
폴은,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끝내 로제에게 말하지 못한 채, ‘자신이 그가 몹시 싫어하는 악착스럽고 독점욕 강한 여자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그에게는 발화하지 못하고 자신만 고통스럽게 안은 채 시몽과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그녀는 오랜 시간 로제와의 사랑이 이어오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이 제 아무리 고통스러웠을지언정 그 고통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시몽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으며 폴은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고, 경탄하기도 하며 좋았지만 잃어버린 자신의 흔적과 자신의 차아를 여전히 찾지 못했고, 마음 한 구석에는 로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워하는 것이라 자연스레 생각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권태에 대해 뒷걸음질 치는 사랑의 시절에 대해 생각해본다. 알랭 드 보통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서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라고 썼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때 낭만이라 보았던 것들이 어떤 두 사람 혹은 두 사람 이상의 관계에서 그것이 잘 유지되도록 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물론 이런 나 역시도 여전히 ‘사랑’의 이름으로 찾게 되는 ‘낭만’의 환상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에서 홍승은의 ‘타자와 함께하는 일은 언제든지 배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위태롭거나 권태로워진다.’는 글을 유념하게 된다.
재밌게도 이 책의 사이를 폴리아모리스트로 생각하는 글도 있었는데, (그러면서 이 관계 반대라는 생각을 가진) 나는 이들의 관계를 폴리아모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책에서도 서로를 다자연대 관계로 인정하며 이어가지 않는 건 물론이다. 주체적 관계 혹은 자유로이 이어지는 사랑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독점이나 자신만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사랑이란 이름 안에 끼워 맞추고 이해시키고자 한 로제는, “그렇다면 폴은 집착을 가지며 서로의 영역을 마땅히 침범해도 된다고 여긴 건 아니냐.” 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폴이 그런 부정적 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폴은 내면화된 불안 속에서 사랑받지 못해 오는 외로움으로 고통스러워했고,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명료하게 나누지 않으면서 로제와의 관계는 단단하게 이어나가려 부단히 노력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왜 그렇게 된 걸까.
폴은 모르지 않았다. 로제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표출했던 자유에의 권리, 자신이 그토록 열렬히 쏟아 부으며 쌓고자 했던 사랑의 안정을 로제의 손은 함께 올리지 않았다는 것. 그 모든 것이 그가 기득권자로서 행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한 갖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고 애매하고 조심스런 행동을 취해왔다는 것을 로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왜 로제와의 관계를 단호히 끝맺지 못하고, 그녀 자신에게 불안감과 사랑하지-않음의 태도를 취했던 것일까.
이쯤 되니, 벨 훅스가 생각이 났다. 그녀는 <사랑은 사치일까?>에서 ‘주변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두 경멸받고 있는데, 과연 자신이 진실로 사랑받는다는 믿음을 유지할 소녀가 있겠는가? 여성됨 자체를 바꿀 수 없다면 그녀는 스스로를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로 바꾸려고 애쓸 것이다.’, ‘현실에서 성인 여성이 자기를 사랑하려면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인생에서 자기를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깎아내리거나 지배하는 데 익숙한 경우 특히 그렇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삶을 살려는 많은 여성들이 왜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라는 글을 썼는데, 폴은 그 두려움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여성-사람일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시몽도, 로제도 아닌 폴에게 미움의 깃발도 사랑의 깃발도 들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폴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연인을 갈망했을지 모른다. 이건 폴이 특이해서도, 별나서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다. 하지만 잘못된 파트너를 선택하면 자존감이 약화될 수 있다. 로제는 폴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상대였을까? 시몽은 어떠할까? 그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았나,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되기 어려웠다. 폴은 시몽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그의 보호자가 되기 위해서 사랑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폴이 페미니즘을 알아가고,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했다면 어땠을까? 2020년에 30대 중반을 살아가는, 그러니까 폴이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받은 언니라고 상상해보는 나는 페미니즘을 그녀와 마주한 테이블에 꺼내본다. ‘제인 저비스는 페미니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내가 어떤 참치 샐러드는 좋아하는지를,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요리해서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원한다면 그 방식대로 가정의 요리법을 정해도 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사랑은 사치일까)는 말처럼 ‘나’를 찾는 것,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져오는 정서적 안정과 상호작용적인 관계의 가능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그 가능을 믿기 때문이다. 벨 훅스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서 사랑의 탐색은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이 천성적으로 사랑에 적합하고, 혹은 배려하고 모성애가 있고, 인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겠다고 선택하는 것. 그것은 나를, 당신을,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다. 그렇게 폴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서사를 쌓아갔다면, 그녀의 행복은, 그녀의 삶은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사강은 사랑의 영원성이 아닌 덧없음을 이야기했다지만, 나는 사랑의 영원성을 믿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은 덧없음이 아니라 그 순간순간, 매일에 서로를 향한 존중과 집중을 노력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내게도 어려운 것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이어지는 나의 미래의 삶에 놓지 않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끝으로 내가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홍승은의 책에서 그은 밑줄은 수도 없이 많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문장은 ‘언젠가 우리가 더 이상 저녁을 함께하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폴리아모리의 실패가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것일 뿐임을 안다. 오늘도 우리는 함께 저녁을 보낸다. 아슬아슬한 꿈같지만 단단한 관계 속에서.’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폴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당신의 사랑의 관계가 끝맺음 된다면 그것은 그 사랑이 지나간 것일 뿐이지, 당신의 실패도 당신의 문제도 당신 탓인 것도 아니라고. 그러니 사랑의 시절에 미워하지 말고 사랑을, 홀로 전전긍긍 말고 노력을, 미루어 짐작 말고 대화를. 우리의 삶에서 사랑은 생각보다 큰 몫을 차지할 테니까 말이다.
(인용도서: 사랑은 사치일까,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낭만과 연애와 그 후의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