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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빛

강화길_치유의 빛

by 수수


사람들이 잘 기억하는 편이다. 키도 크고, 몸도 크고, 눈도 크고 뭐 그럴만도 하겠다 싶다며 대수롭진 않게 여겼다가 <치유의 빛>을 읽다가 다시 그 부분이 상기되었다. 사람들이 나를 잘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이유는 물론 나의 다른 요소가 있겠지만, 내 몸 ‘때문’이거나 ‘덕분’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지수 역시 그랬다. 지수는 살이 찌면서 일상의 모든 것들과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고, 또 커진 만큼 일상으로부터 확실한 존재감을 얻었다.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때부터 키가 컸고, 작은 시골에서 어느날부터는 가장 큰 아이가 되었다. 고등학교때는 커진 키와 커진 몸으로 여성혐오를 일삼는 남성들의 입방아에서 내 이름도 나왔다. 이것이 나의 몸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는 위축과 생각들이 나에게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입방아에 올라가고 통제되고 판단되는지.


지수의 경우도 그랬다. 부피감은 그녀에게 ‘덕분’보단 ‘때문’이 많랐다. 그녀에게 그때의 경험은 성장기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여성이 아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 평가와 판단들. 그것이 그녀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그는 나비약을 일상적으로 찾고 섭식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었다. 더이상 그때의 자신도, 몸도 아니지만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몸과 생의 시간은 ‘그때’가 아니지만, ‘그때’를 기억한다. 그렇게 ‘지금’이 된다. ‘지금’을 만드는데 매순간 ‘그때’가 어떤가에 따라, 무엇을 주고 받는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온도도 색깔도 달라진다. 개인의 몸은 개인의 것이라고 하지만 살아가는 세계와 관계 맺는 존재들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몸은 타인과 함께 엮이고, 사회와 함께 흐른다.


소설을 읽다 언젠가 읽어야지 했다가 읽지 못한 섭식장애 당사자의 책을 빌려왔다. 물론 소설은 섭식장애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 그리고 그 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이유로 ‘아픈’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것은 여성의 몸이어서 더 가중되는 것들이 있고 또 계급적•경제적 이유로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 각기 다른 서사를 지녔지만 그들 모두에게 같은 것은 ‘고통’이다. 그 고통이 주는 무게에 절박해진 이들이 찾는 곳 ‘채수회관’은 과연 어떤공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종교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겠지만, 기억의 시작을 찾는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 여성주의적 사유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시절에는 그 손을 내민 곳이 교회였을 것이고, 내게는 또 다른 자원들과 정보, 선택이 있음으로 그것이 교회이지 않는 것. 유한한 존재들로서 살아가는 생은 그 유한을 미처 깨닫지 못하기도 하고, 그러하기에 아프지 않고 지나가길 바라기도 한다. 나만 해도 그럴 것이다.


다양한 얽힘의 이 이야기가 소화되는 건 지금이 아니라 언젠가일 것 같다. 생각이 많아졌다.


<치유의 빛>, 강화길,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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