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시대의 페미니즘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이란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을까. 사실 처음엔 조금 물음표로 시작했다. 최근 많이 보이는 돌봄에 대해 또 어떤 생각이 더해지고, 또 다른 이야기들이 어떻게 풀어질까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신자유주의와 코로나19라는 이 새롭고 빠른 재난의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함께 할 것인지, 어떻게 서로의 안전을 모두 지켜낼 것인지를 생각하게 됐고 조금 울컥했다. 신자유주의와 현재의 코로나19 재난 상황, 그리고 무엇을 우선하는 페미니즘, 경쟁과 능력주의, 공고한 성차별과 성적 폭력과 안전 문제 등은 각각 떨어진 개별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엮어지고 묶여지는 것들이라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칼럼 읽듯 금방 읽어나갈 수 있는 13개의 글은 지금 이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가치로 안고 갈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낸다. (주옥같은 글이란 표현 쓰고 싶을 정도.. 글들 너무 좋았음. 이 책 이미 많이들 읽으셨겠지만.. 아직이라면 꼭꼭 읽어보시라요) 이 시대는 안전을 위해 나 자신도 변화해야 하며 서로의 연결성을 바라보고 토론해야 하는 시대이다. 코로나 19와 돌봄에 대한 전희경의 글이 혐오 차별과 맞닿아지는 건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디도 안전하지 않은 지금이라면 모든 것을 안전하게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여러 번 곱씹어 본다.
이 책을 엮은 김은실은 이른바 ‘여성계’를 ‘페미니스트’판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논쟁이 필요한 이슈에 개입하지 않아 생겨난 곤경에 대해 이야기 한다. “누가 여성인가”로 촉발되고 지워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생물학적 여성 담론으로 협소하게 환원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여성이란 누구를 지시하는 범주이고 개념인가. 여성이 그렇게 분명하고 자명한 범주인가를 질문하며 여성이라는 범주가 정치적임을 이야기한다. 정희진의 글을 읽으며 이 사회에서 억압받고 차별받은 ‘여성’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환원으로 고정 불변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성차별을 해결하지 않으려는 그 어떤 사유도 대안일 수 없다.’는 정희진의 말을 생각하면, 일부 ‘여성 우선 페미니즘’이 말하는 성차별의 해결에 트랜스젠더는 그것을 공고하게 만드는 적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할 동지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트랜스 혐오와 여성혐오는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싸움을 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맥락이 되고 힘이 되는 운동, 멀티트랙 운동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손희정의 글처럼 이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성’ 범주에 도전하는 존재들로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립구도가 아니라 차별과 혐오의 경계를 함께 무너지게 할 힘을 주고받을 수 있지 않을까. 페미니즘을 알수록 나는 왜 줏대 없어지는가는 나의 계속된 고민이었다. 선명하지 못하고, 계속 고민만 되어버리는 것이 때론 답답했다. 하지만 그것이 쉽게 무언가를 버리거나 취하고, 쉽게 판단하고 혐오하지 않는 방법이 될 수 있다면 오히려 계속해서 안고 가져가야 하는 게 아닐까.
또 권김현영의 글을 읽으며 여성=잠재적 피해자라는 것에 대해 지난 시간 경험한 것들과 마주한 것들 속에서 그때보단 덜 괴롭게 하지만 좀 더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로 쉽게 흘러가고 판단되지 않고 질문할 수 있고, 질문 받을 수 있는 고통의 당사자와 곁에 대한 고민은 피해자 중심과 피해자 정답주의에서 늘 고민되고 껴안는 문제인 것이다. 맥락을 자르지 않고 바라보면서도 피해자를 지우지 않는 ‘너머’의 페미니즘과 현실의 문제와 마주함은 더 이상 책 속 이론만이 아닌 내 경험에서 체화되어 한때 나를 몹시나 괴롭게 하던 것이었기에 그의 글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나는 절절한 심정이 되어 조금 울고 싶었다.
아무래도 최근 상황들로 인해 ‘여성 우선 페미니즘’과 그에 동반되어 나오는 트랜스 혐오 등이 주 관심사였다. “아무도 죽이지 않는 운동”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 아무의 죽음 없이도 우리의 요구를 풀어낼 수 있는 세상. 누군가 죽는 것에 같이 애도할 수 있고, 누군가를 원치 않는 죽음에 두지 않는 것. 당신의 안전과 나의 안전 모두가 같이 지켜지는 세상에 대해 나의 여성이란 정체성을 피해자로만 굳혀 만드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을 나는 택하고 싶다. 전희경의 글처럼 페미니즘이 약자의 인식론이자 동시에 더 정의로운 사회에 관한 정치적 상상력으로 본다면 이것은 사회의 보편을 새로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것이 보편이라는 틀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사회의 보편적이고 보통의 존재로서 자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 이제까지와는 다른 선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불가능하진 않다. 우리는 그전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생존 방향을 누군가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고도 설정할 수 있다. 배제하는 운동과 집중하는 운동은 분명하게 다르지만, 한 끗 차이로 당신의 갈래가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안전하게 살고 싶다. 나는 당신을 밟는 안전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밟고 서려는 혐오와 싸울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안전하게 살고 싶다.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제목이 있었다. “나의 안전은 너의 배제로 완성되지 않는다.” 당신의 안전은 누군가를 배제하고 무언가를 지우는 것으로는 지켜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