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족의 괴로움을 벗어내는 방법, 명상
'명상'이라 말하면 사람이 한 명 떠오른다. 속세를 초월했을까,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가부좌를 튼 채 앉아있다.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무릎에 얹은 채 가만히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바르게 앉아 자신을 살피는 모습. 이런 모습이 내 머릿속에 있는 명상인 듯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르게 앉아본다. 흐음, 바르게 앉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가부좌를 틀면 나을까 싶어 오른쪽 발등을 먼저 왼쪽 허벅지 안쪽에 올려본다. 반대쪽 발도 종아리를 교차하여 올려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억지로 모양을 만들고 나니 온몸이 기우뚱, 요가 선생님은 가부좌로 명상을 하면 허리가 반듯하게 펴지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하신다던데 나는 몰입은커녕 1분 자세 유지조차 버겁다. 에라 모르겠다, 그대로 누워버린다. 누워서도 명상할 수 있다고 했었어. 그렇지만 그마저도 실패.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거나 금세 제멋대로 뒤척거린다. 누워서도 한 자세를 유지하기 어렵다니, 의식이라는 것이 내 몸을 이토록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명상은 늘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 지극히 세속적인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던 탓이었을까. 그러던 내가 최근 명상에 관심을 두고 있다. '잘 사는 것'이라는 큰 주제 중에서도 요즘 나에겐 '건강'이라는 키워드가 크게 자리한 까닭이다. 치안도 좋고 의료 기술도 상당 수준 발달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특별히 상하게 하는 주 요인이 지나친 스트레스인 것 같다. 흔한 바쁜 현대인 중 한 명인 탓도 있겠지만 내 손을 떠나 있는 요인은 차치하고서 내게 오는 스트레스, 혹은 마음의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생각해 보았다. 욕망이었다. 더 정확히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한 욕망.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아무리 팔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에 시선을 떼지 못하며 괴로워하는 욕망.
숨 가쁘게 달리다가 문득 머리가 없는 것(혹은 마비된 것)처럼 느껴지거나 혹은 머리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머릿속은 온갖 해야 할 것들과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차서 나를 찬찬히 살펴볼 틈조차도 없었다. 그럴 때에는 비우는 것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삶에는 어디든 여백이 필요했다. 내 안에 여백을 만들어주는 과정. 명상이 내게는 그 열쇠로 느껴졌다. 어쩌면 여백을 만들어 주는 것뿐만 아니라 가끔은 잔뜩 엉켜버린 실을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그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희미한 기대도 하게 되었다.
이토록 거창한 동기를 가지고 명상을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 보고 있건만 그토록 쉬워 보였던 것이 실제로 내가 해보니 어찌 이리 어려운지. 수행하는 것이 어려우니 자꾸 글로 배우려고 하고 영상을 검색하며 요행을 찾는다. 그래, 가부좌를 포기하고 우선 그냥 바르게 앉거나 바르게 누워서 5분이라도 호흡에 집중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명상이 속세를 초월하거나 연꽃 위에 앉아 후광을 내는 붓다와 같은 대단한 형상이 아니라 그냥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일상 속에 당연한 모습으로 들어와 있기를 바란다. 머릿속을 텅 비우고 내가 바람인 듯, 숨인 듯,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듯 그렇게 비우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결국 내게 충만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이 사실을 지금은 어렴풋이만 짐작할 뿐이니 언젠가 정말로 충만함을 느끼길 바란다. 시간을 쪼개 쓰는 습관이 쉬이 놓아지지 않아 정적이 느껴질 때면 반사적으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를 떠올리는 내가 언젠가 몇십 분이고 몇 시간이고 무념무상으로 몰입하여 깊은 숨을 내 쉬며 명상에서 깨어나는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수많은 바람을 지금 또 한 번 내려놓고 노트북을 닫고 눈을 감아보련다. 내가 행복하도록,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욕망하는 삶을 살 수 있길.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섯 마음'은 초고클럽 멤버들과 함께 쓰는 공공 매거진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희로애락애오욕' 중 '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