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을 맞아 이쁜 여자와 함께 친가 친척들이 모여서 살고 계시는 부산을 방문했다. 심야버스를 타고 내려간 것이라 아직은 잠에서 덜 깬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정오가 넘어 느지막이 일어나, 내가 이전에도 글을 쓴 적이 있는 사랑하는 경양식집 '함박마을'에서 거한 점심을 먹고는 다시 발걸음을 영도를 향해 옮겼다.
음식 외에도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이쁜 여자와 어머니를 모시고 영도의 모모스커피 분점에서 즐겁게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영도의 도계교를 건너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향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나와 SNS 이웃이기도 하신 '데스티니 빈티지샵'이 있기 때문에 이쁜 여자에게 설빔맞이 쇼핑을 시켜줄 겸,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탕수육이 굉장히 훌륭한 '옥생관'에서 저녁도 먹을 겸 가는 것이었다. 보수동에는 게다가 괜찮은 드립커피를 하는 카페도 있어서 내가 부산에 이쁜 여자와 함께 내려오면 꼭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데 나 아직 점심에 먹은 함박스테이크가 다 꺼지지 않았어."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함께 걸어가던 이쁜 여자가 옆에서 말을 꺼낸다. 영도구의 도계교에서 커다란 백화점과 국제시장을 지나 용두산 공원의 후문 근처를 지나던 중이었다. 점심 먹은 것을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걸어가자고 하여 40분을 가까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배는 아직 든든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하며 옥생관의 탕수육을 포기하고 다른 메뉴를 선정하자며 의견을 나누던 도중, 부산영화체험박물관과 용두산 공원 후문의 맞은편 골목, 1층은 이미 불이 꺼진 꽃집이었지만 건물의 2층으로 진입하는 골목에 작은 입구와 커다란 토마토가 그려진 채 'E'monder'라고 쓰인 입간판. 커다란 토마토라니, 토마토로 만든 소스와 음식을 좋아하는 내가 그것을 놓치고 넘어갈 리 없다.
"엄마, 자기야, 잠깐만, 나 저것 좀 잠시 보고 올게."
"그래, 그러렴."
동광동에서 보수동으로 가는 길목에 잠시 어머니와 아내를 세워두고 나는 건물 2층으로 들어가는, 밝고 따뜻하게 빛나는 입구로 향한다. 프랑스식 브런치, 카페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고 그 옆에 건물로 들어가는 두꺼운 철제문에는 해당 식당에서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서 붙여놓은 메뉴들의 사진과 가격들이 나의 멱살을 잡아당긴다.
'어이, 무슈, 오늘 저녁에 깔끔하고 가벼운 프랑스 브런치, 어떤가요?'
'음.... 가격이 조금 있는 메뉴들인데... 생각을 좀 더 해볼게요.'
'생각을 해본다니, 메르씨, 무슈. 빠르게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위, 위, 마담. 메르씨... 메르씨...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바스크 빵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단단하고 두꺼우며 기다란 바게트빵, 나머지 한 손에는 커다란 와인병을 거꾸로 잡았지만 레이스가 달린 앞치마와 두건을 쓴 것 같은 아가씨가 웃으며 나를 협박하는 느낌이다. 양쪽에 잡은 식재료 겸 무기들을 붕붕 돌리며 웃는다. 나는 프랑스 음식보다는 이탈리아 음식인 파스타 등에 더 익숙한지라 이러한 협박이 어색하지만 무섭지는 않다.
음식 사진에 담긴 라따뚜이, 가지구이, 양송이구이와 쌀로 만든 바게트 등이 나의 발을 더 떠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잘 익은 뜨거운 토마토와 가지의 맛과 식감,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군침이 돈다. 거기다가 우리는 저녁으로 위장에 부담되지 않는 식사를 찾고 있었기에 채소를 주 재료로 한 요리는 안성맞춤이다.
'라 그랑드나씨옹(프랑스인들이 프랑스를 지칭하는 단어. 지금도 스스로 이렇게 부르는지는 나도 모른다.)의 부름에 응해야겠군. 미식의 본고장, 레스토랑의 원조, 현대적 요리가 시작된 곳의 음식을 맛볼 좋은 기회다.'
나는 잠시 건물의 입구에서 발길을 돌리고는 어머니와 이쁜 여자에게 내가 봤던 음식의 사진들을 설명해 주었다. 채소가 주재료인 요리들에 대한 얘기를 듣자 무거운 중화요리보다는 훨씬 낫지 않냐며 좋은 반응. 보수동 책방골목에 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도 생각나면 먹으러 가자며 긍정적인 검토를 마친다. 그리고 이쁜 여자가 보수동 책방골목의 운명 빈티지에서 설빔을 구입한 이후에도 우리는 에몽데의 가지와 토마토 요리를 잊을 수 없어서 다시 용두산 공원 후문 쪽으로 향했다. 작은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 가니 프랑스식 브런치와 카페를 판매하는 2층에 있는 가게의 이름은 에몽데(E'monder)였고 채소와 고기가 적절하게 들어간 프랑스 가정식으로 보이는 요리들을 주로 하고 있었다. 닭안심이 들어간 라따뚜이, 고기로 속을 채운 가지구이, 새우를 올린 양송이구이와 쌀로 만든 바게트 등 편안하고 따뜻하게 보이는 요리들이었다.
'다시 봐서 반가워요, 마담. 이제 들어갈 테니 와인병과 바게트는 내려놓으시죠'
'위, 위, 무슈. 어서 오세요, 메르시.'
가파르고 살짝 좁은 계단을 올라서 들어가,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원목과 유리창으로 꾸며진 문을 열고 들어간다. 꽃무늬와 레이스로 꾸며진 펑퍼짐한 앞치마와 두건, 양갈래로 머리를 따신 여사장님과 편안하게 옷을 입으신 덩치 좋으신 남자 사장님께서 우리를 맞이하신다. 마치 소설 '작은 아씨들'에서 튀어나온, 과거의 어느 여주인공과 현대적 웹툰에서 튀어나온 어느 남주인공이 만나서 프랑스 브런치 식당을 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원목으로 된 짙은 갈색의 테이블과 의자, 그 위에 다시 하얀색 배경에 작고 분홍분홍한 꽃들이 출력된 식탁보. 내가 살면서 이렇게 귀엽고 이쁜 식당에 들어간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3명이요."
"그럼 여기, 4인용 좌석에 앉으세요."
가게를 쓱 둘러보니 주변에서 프랑스식 음식에 와인 1병을 차갑게 마시는 여사님들, 라따뚜이에 바게트를 함께 나눠먹으며 작게 수다를 떠는 손님들. 창가에는 혼자서도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작은 바테이블이 있고 구석에는 오래된 티브이, 철 지난 크리스마스를 떠오르게 하는 트리장식과 산타인형, 개수대까지 한눈에 보이는 밝은 주방 안에서 사장님 내외가 요리를 하고 계시고 주방 옆에는 작은 와인 냉장고가 작은 불빛을 깜빡거리며 앉아있다. 계산대 앞에는 가게에서 직접 구운 쌀바게트들이 자신들을 집어갈 손님들을 기다리며 서있다.
배가 어느 정도 고팠던 우리는 닭안심이 들어간 라따뚜이, 가지구이 그리고 새우를 올린 양송이구이를 주문했다. 거기에 겨울철 프랑스 카페에서 빼놓으면 섭섭한 레드와인 뱅쇼와 화이트와인 뱅쇼를 주문한다. 따뜻한 뱅쇼들은 계피와 오향, 로즈메리와 사과, 배 등의 과일향이 산뜻하고 황홀하게 피어오른다. 레드와인 뱅쇼는 살짝 무겁고 쌉쌀한 맛에 향신료의 향, 거기에 단맛과 신맛. 화이트와인 뱅쇼는 그에 비해 조금 더 새콤하고 달달한 맛이다. 감기에 살짝 걸리신 어머니를 위해 주문한 음료라서 마시기 쉬운 화이트와인 뱅쇼를 어머니께 드리고 나와 이쁜 여자는 레드와인 뱅쇼를 나눠마시기로 한다. 음료에 꽂힌 시나몬스틱을 빨대 삼아서 뱅쇼를 흡입한다. 계피향이 확 올라오면서 뜨끈한 뱅쇼가 몸을 덥히니 온몸에서 향신료와 와인의 훈연향이 올라오는 기분이다.
에몽데의 무알콜 레드와인 뱅쇼. 시나몬스틱, 사과, 레몬, 팔각 등의 향신료가 가득하다.
"라따뚜이 나왔습니다~ 무쇠팬이 뜨거우니 손 조심하세요. 이 바게트는 쌀바게트예요, 라따뚜이를 올려서 같이 드셔보세요. 가지구이와 양송이구이도 곧 서빙할게요."
소녀소녀하고 푹신한 복장의 안사장님께서 음식을 가져오시며 안내해 주신다. 라따뚜이에는 작은 살라미, 애호박, 토마토, 가지와 새송이가 올려져 있고 그 밑에는 양파와 토마토가 들어간 토마토소스가 닭가슴살 조각들과 함께 채소들을 받쳐주고 있다.
에몽데의 닭안심 라따뚜이와 쌀바게트
일단 애호박, 살라미, 토마토, 가지, 새송이를 토마토소스 가득 묻힌 숟가락에 올려 한입에 넣는다. 뜨끈뜨끈한 것이 새콤한 향과 함께 들어온다. 아삭아삭하고 달큼한 맛이 은은하게 나는 애호박과 새송이 사이로 쫄깃하고 아삭한 가지, 새콤한 토마토의 맛이 느껴지면서 약간 매콤한 살라미가 뒤 따라 들어와서 다양한 식감과 맛이 심심하면서 자극적이지 않지만 풍부한 맛과 식감을 표현한다. 거기에 달콤한 양파가 부드럽게 씹히는 토마토소스, 아주 질 좋은 버터를 사용해서 재료를 볶아서 만들었는지 끝까지 고소하고 유지방의 풍미가 가득한 맛이 음식들이 식도로 다 넘어간 이후에도 입안에 남아 다시 입을 다시게 만든다.
"와, 이 정도의 채소요리라면 싫어하는 아이들이 없겠는데."
"버터가 정말 좋아, 이 고소하고 부드러운 유지방의 맛이 입안에 끝까지 남네."
아삭, 사각, 쫄깃한 식감이 번갈아 돌아가면서 고유의 맛을 입안에서 뽐낸다, 분명 요리는 화려한 맛과 향, 식감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프랑스 가정식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번쩍거리면서 빛나는 회전목마를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회전목마를 맛으로 표현하면 이런 느낌이려나.
거기에다가 바게트빵을 들어서 입으로 한입 베어문다,
바사사삭
입에 넣어서 씹자마자 바게트빵의 구수한 풍미가 코까지 가득 올라온다, 화덕에 들어온 맛이다. 거기에 쫄깃하고 부드러운 쌀빵의 풍미, 일반적인 바게트빵보다 덜 단단하고 밀의 고소한 맛은 덜하지만 부드럽고 구수한 풍미에 한국인이 사랑하는 쫄깃하고 부드러운 맛까지 더해지니 와, 소스도둑이 따로 없다. 라따뚜이의 채소들과 토마토소스가 이 환상적인 쌀바게트와 합쳐지니 자연스러운 맛과 식감들이 만나 눈이 번쩍 뜨이는 물랑루주 공연이 시작된다. 채소와 빵이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가지구이 드릴게요~ 위에 모차렐라 치즈가 덮여있으니까 굳기 전에 먼저 드셔요. 양송이구이는 그 후에 드셔도 됩니다~"
저 우람하고 두툼한 가지를 보라, 에몽데의 가지구이다.
돼지고기와 양파 등으로 속을 채우고 치즈로 덮어 구워낸 가지구이가 뜨겁게 등장한다. 가지구이도 라따뚜이에 사용된 고소하고 달콤하며 감칠맛 넘치는 토마토소스를 속이불로 덮고, 겉은 치즈이불을 덮었다. 먼저 먹으라는 마담의 말씀에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서 먹기 좋게 슥슥 썰어 놓는다. 가지요리에 대한 나의 생각은 아래와 같다.
'튀기거나 구운 가지는 배신하지 않아. 가지가 맛이 없다면, 요리 방법을 잘못 선택한 거야.'
그리고 나의 가지에 대한 신념을, 에몽데 가지구이는 배신하지 않았다. 수분이 가득한 뜨거운 가지가 촉촉한 고기처럼 씹히는 와중에 잘근거리면서 짭짤하게 씹히는 고기와 양파들, 그리고 쫄깃하고 고소한 구워진 치즈. 거기에 끼얹어지는 토마토소스의 또 다른 식감과 풍미. 천천히 먹고 싶었는데, 구운 가지와 부재료들의 조화가 좋아서 천천히 먹을 수가 없다. 가지가 구워지니 그 껍질의 바삭함이 토마토소스와 서로 균형을 잡아주고 거기에 고기조각과 다진 채소로 만들어진 속재료가 위장을 뜨끈하게 채운다.
순식간에 가지구이가 우리들의 입속으로 퇴장하고 이제는 양송이구이 차례다. 붉게 익혀진 작은 손질새우가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양송이 구이에 올라가서 나의 포크를 유혹한다. 한꺼번에 포크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간다. 치즈와 버터, 다진 햄과 채소로 속을 채운 양송이가 새우 모자를 벗으며 인사한다.
부드럽게 씹히는 새우의 육질 사이로 양송이의 조금 더 단단한 육질과 육즙이 새어 나온다. 달다, 양송이가 달다, 거기에 양송이를 받쳐주는 고급진 치즈와 버터의 맛. 다양한 재료들이 채워주는 맛, 요리사가 지휘하는 식감과 풍미의 조율을 거쳐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맛을 선사한다. 양송이와 새우를 먹는데, 양송이와 새우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다. 이것은 마술인가? 속임수인가? 아니, 요리사의 실력이다. 심심한 맛에서 각 재료들이 장점을 부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실력이다.
음식을 다 먹고 집에 가기 전에, 이쁜 여자는 쌀바게트가 너무나 맛있었다며 가게에 남아있던 쌀바게트 2개를 다 사가겠다고 했다.
"그걸 다 산다고? 좀 많지 않아?"
"뭐가 많아. 너랑 내가 아침에 하나씩 먹으면 한 끼에 없어질 텐데."
"그렇네, 맞는 말이군...(할 말 없음)"
그리고 쌀바게트는 이쁜 여자와 내가 다음 날 아침 식사로 아주 맛나게 잘 먹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가게를 나오면서 잘 먹었다고 웃음으로 인사하며 얌전히 나오기는 했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다른 세계에서의 식사에 대해서 사장님들께 하지 못한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