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골 피자집 샌마르에서 이쁜 여자와 저녁 만찬을 즐긴 후 집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길이었다, 임당동을 무조건 지나와야 하기 때문에 카페와 술집들이 모여있는 2차선로 위, 눈에는 잘 보이지 않던 골목 안 쪽에 있는 단독주택이 공사 중으로 보였다.
"저기가 언제부터 공사 중이었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지난달부터였나?"
단독주택을 카페나 식당으로 개조해서 영업을 하는 것이 강릉에는 몇 년 전부터 유행이라 새롭게 강릉에 정착하시는 분들도 그러한 흐름에 함께 하듯, 멀리서 보기에는 작아 보이는 어느 집에 무언가 새 단장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참지 못하는 이쁜 여자가
"여기 잠깐 있어봐, 다녀올게"라며
기어코 골목의 제일 안쪽에 자리 잡은 공사 중인 단독 주택 앞으로 총총 뛰어들어간다. 근처에는 신축 원룸 빌딩과 다른 주택이 있는, 골목의 끝에 자리 잡은 정겨워 보이는 하얀 주택. 잠깐 다녀온 이쁜 여자는
"카페처럼 보여, 새로운 카페가 들어올 건가 봐."
"그래?"
강릉에 새로운 카페라니, 새로울 것이 없는 소식이다, 꼭 강릉이 아니더라도 어느 도시나 카페라는 것은 차고 넘치니까. '별거 아니었군'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나는 카페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는 직접 빵을 굽는 브런치 카페가 생겼다는 것을 여러 소식통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직접 찾아보니 양파수프와 바게트, 샌드위치 등을 팔고 있는 '멜트인(Melt-in)'이라는 곳이란다.
'양파수프라.... 나에게는 추억과도 같은 음식이군.'
양파수프는 프랑스에서 신혼부부에게 대접한다고 많이 알려진 음식이다. 양파라는 채소가 피를 맑게 해 주고 혈류를 원활하게 해주는 등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정력'음식으로 통하기 때문이다(혈관 건강과 정력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찾아보기를 바란다. 양파가 몸에 참 좋은데.... 설명을 할 수가 없네....). 양파를 잘게 썰어서 캐러멜라이즈로 볶아낸 후에 육수와 부재료들을 넣어서 뭉근하게 끓여내는 음식이다, 거기에 크루통을 좀 더 띄우면 더 맛있겠다. 맑고 깔끔하면서 캐러멜라이즈 양파의 달달함과 훈연함이 특징인 수프인데, 식당이나 요리사마다 맑게 끓이거나 크림을 좀 더 넣어 뭉근하게 끓이거나 차이는 있다.
'좋아, 오늘 점심은 수프와 빵으로 채워볼까.'
직장에서 오전 근무 시간을 순조롭게 보내고는 나는 홀로 점심을 먹겠다고 말씀드린 뒤 자전거를 몰고는 임당동으로 향했다. 임당동 문화의 거리를 지나서 임당동성당으로 향하는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저 멀리 골목 안 쪽에 보이는 하얀 대문이 보이는 집이 멜트인이다.
애옹 - 야옹 -
멜트인의 정문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주차하려고 보니 카페의 대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길고양이들이 진을 치고 앉아있다, 자신들에게 간식을 대접하지 않으면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식빵을 굽거나 큰 등치를 앞세우고는 엎드려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밥 먹으러 와서, 너희들 뭐 줄 것 없단다. 미안하다."
고양이들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을 하자마자 나를 바라보던 고양이들이 고개를 휙 돌려서 다시 양지바른 담 위나 골목 안으로 들어가 식빵을 굽기 시작했다. 똑똑한 녀석들.
어느 한적한 시골집에 놀러 온 것처럼, 대문을 지나쳐서 들어가니 작은 정원과도 같은 마당이 눈앞에 펼쳐진다. 시작부터 눈과 마음이 편안한 분위기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따뜻한 온기가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한 분이세요?"
"네네"
"저쪽 안쪽에 앉으시겠어요? 테이블 정리하고 메뉴 금방 갖다 드릴게요."
친절한 사장님들과 직원분을 통해서 훈훈하게 전해진다. 화덕이 후끈거리는 부엌에서 전해지는 열기인지 아니면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하는 분들의 분위기를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은 확실하다.
주변에는 잠시 어느 유럽 지방의 시골집, 별장에 온 것과도 같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원목과 아이보리색 페인트로 된 벽면과 구석구석에 놓인 작은 식물들과 소품들, 작은 테이블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소곤소곤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혼자 온 손님들도 있지만 모두의 공통점은 각자 수프에 빵을 다 하나씩 먹고 있다는 점이다.
주문을 하기 위해서 부엌 쪽으로 다가가니 구수하면서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빵 냄새가 멀리서부터 느껴진다. 양파수프, 앉은뱅이밀로 만든 바게트, 그리고 치아바타 빵을 사용한 포카치아 샌드위치 그 외에 커피나 차 등 음료들. 매 끼니를 거의 한식만을 추구하는 분들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곳이지만 나처럼 밀가루 음식과 양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첫눈에 반해버릴 곳이다. 화덕에서 뿜어지는 열기와 빵냄새는 정말 매력적이니까.
"양파수프 작은 것 하나랑, 멜트인 샌드위치 주시겠어요?"
"네, 그렇게 할게요. 사이드로는 토마토 마리네이드와 당근라페가 있는데, 어느 것을 드시겠어요?"
멜트인의 분위기를 보아서는 어느 것을 시켜도 참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근으로 만든 라페를 제대로 먹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다. 집에서 대충 만들어 먹었던 당근라페도 맛이 좋았는데, 전문점에서 만든 라페는 어떤 맛이려나.
"당근라페 부탁드려요."
주문을 마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와서 잠시 눈을 들어 바깥의 창밖을 본다. 정원에 내리쬐는 것을 모자라 창문을 통해 나에게도 빛을 허락하는 햇살을 즐기고, 멜트인의 공기 중에 떠다니는 여러 냄새를 맡으며 나에게 허락된 나의 평온한 점심시간을 즐긴다.
멜트인의 양파수프, 당근라페, 앉은뱅이밀 바게트, 멜트인 샌드위치
"식사 나왔습니다, 수프에는 원래 치아바타를 함께 드리는데요, 주문하신 샌드위치에 이미 치아바타를 사용하고 있어서요, 앉은뱅이밀 바게트로 대신드렸어요."
"오우, 감사합니다."
홀을 담당하시는 사장님의 세심한 배려에 실제로 음식을 입에 넣기 전부터 기분이 좋다. 덕분에 멜트인에서 생산하는 빵의 종류를 폭넓게 먹어볼 수 있게 되었다. 양파수프부터 한입 떠볼까. 숟가락으로 수프를 건드리자 카라멜라이징 된 양파의 훈연향과 달콤함이 코로 훅 밀려들어온다, 진한 육수와 크림이 섞인 수프 위로 올리브유, 파마산 치즈가루가 돛단배처럼 둥둥 떠다닌다. 양파의 향에 이어 부재료들의 고소한 향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크림과 섞인 육수, 흰 파마산 치즈 가루와 검은 통후추가 흑백을 이룬다.
후루룩
"으음... 오...."
입안에 가득 퍼지는 양파의 달콤함과 기분 좋은 훈연맛, 입안에서 아삭, 말캉거리며 가볍게 씹히는 채 썬 양파의 식감에 치아가 춤을 춘다. 달다, 양파가 매우 달다, 익힌 양파의 단맛과 식감을 끝까지 끌어올려낸 맛이다. 이 양파를 카라멜라이징을 위해서 사장님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양파를 불 위에서 휘적이며 타지는 않을까 신경을 쓰며 바라보았을지 상상이 된다. 그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한 입.
주인장의 정성이 가득 담긴 양파수프
호록
"와..."
한 숟가락을 더 뜨니, 양파의 맛과 향을 넘어서 고소하고 진하게 우려낸 수프의 육수와 그 따뜻함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혓바닥 위로 가득, 수프의 부드러움과 진득한 고소함이 스며든다. 이미 나의 입안이 진득하고 고소함으로 물들어, 뒤 따라 들어오는 파마산 치즈는 그 쌉싸름하고 구수한 풍미만으로 금상첨화다. 양파수프를 먹으며 10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10대를 중국에서 보낸 나는 주변 아파트 단지에 함께 있는 클럽하우스의 레스토랑에 어머니와 곧잘 갔었다. 근처가 테니스장과 공원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운동을 마친 사람들의 식사를 위해서 경양식과 중식을 대접하는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메인 메뉴를 주문하면 항상 전식으로 주었던 수프가 양파수프였다. 양파를 검게 그을리도록 볶아내어 맑은 육수를 넣고 짭짤한 감자로 뭉쳐 만든 작은 튀김을 그 위에 띄워주는 것이 그 레스토랑의 특징이었다. 어머니와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거나, 바깥나들이를 마치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녁으로 간단하게 먹었었는데 그때 그 양파수프를 생각하게 하는 멜트인의 양파수프였다. 분명 요리하는 방식은 많이 다른 두 양파수프이지만, 양파의 달콤함과 훈연향은 둘 다 진하다.
'중국에서 먹던 양파수프도 참 맛있었는데, 그 레스토랑은 아직도 거기 있으려나. 수프 말고도 닭안심으로 튀겨내던 코돈부르도 상당히 맛이 좋았지.'
수프를 뜨다 보니 순식간에 다 먹어버릴 듯하여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당근라페가 작은 그릇 안에 소복하게 담겨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하다. 포크로 가득 담아서 입으로 가져간다.
당근라페, 설명이 없다면 잘 익은 배추김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짭짤하면서 고소하다, 잘게 썰린 당근의 풍미와 식감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으깨지며 입과 코로 퍼진다, 마지막에 살짝 느껴지는 겨자씨의 맛이 독특하다. 이쑤시개들이 잘게 부서진 것과도 같은 모양의 당근라페, 이 정도로 작은 조각이 되어야 당근라페가 맛이 좋구나. 후추, 올리브유와 겨자씨가 당근 특유의 달달한 듯 고소한 맛에 어울려서 계속 손이 가는 어느 새우 과자와도 같은 중독성이 있다. 당근라페를 잘하는 경양식집이라, 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한식집, 짜차이를 맛있게 담그는 중식집과도 같다.
이제는 옆에 멜트인에서 직접 만든 샌드위치가 있다, 샌드위치 말고도 잠봉뵈르도 있지만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속재료를 보니 호기심이 발동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멜트인 샌드위치, 속재료들의 조화가 훌륭하다
와 사사사 삭
겉은 단단하고 속은 부드럽고 구수한 치아바타를 뚫고 속까지 베어 물면 내가 사랑하는 썬드라이토마토와 바질페스토의 맛이 확 올라온다. 새콤하고 감칠맛이 터지는 토마토에 고소하고 허브의 향이 가득한 페스토, 거기에 쫄깃한 프로슈토까지 입안에 씹히니 맛과 식감과 포만감은 이미 충분한 줄 알았는데,
'어라, 끝이 엄청 상큼한데? 오, 발사믹이다.'
샌드위치를 덮는 치아바타에는 발사믹(레드와인식초)이 얇게 발라져 있어서 진부할 수 있는 샌드위치의 맛에 신선함과 상큼함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 레드와인 식초의 상큼함과 새콤함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대환영이다. 샌드위치에 발사믹이라니, 사랑스러운 발상.
꼭꼭 씹으면서 천천히 음미해보자, 재료들이 신선하다
'여태까지 샌드위치를 해 먹거나 사 먹으면서도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 이거 훌륭하네.'
토마토, 바질, 프로슈토, 발사믹에 포카치아. 멜트인 샌드위치에는 이탈리아가 담겨있다. 한입을 씹으면 지중해식 식사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훌륭한 조합이다.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고개가 계속 끄덕여진다, 심히 만족스럽다. 토마토의 감칠맛, 바질페스토의 풍미, 프로슈토의 식감과 짭짤함, 발사믹의 신선함에 치아바타 빵의 구수함까지, 이탈리안 헝그리 베스트 파이브가 아닌가.
'이제 남은 빵은 네 녀석이지.'
겉은 단단해 보이지만 속은 신선한 돼지고기처럼 은은한 분홍빛이 도는 앉은뱅이밀 바게트. 앉은뱅이 밀? 처음 들어보는 분들에게 살짝 얘기를 드리자면, 앉은뱅이 밀은 기원전 300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재배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토종 밀이다. 조선시대에는 서민들이 먹을 수 있는 품종이 될 만큼 많이 재배되었던 앉은뱅이밀은 전 세계적으로 식량난 해결에도 기여를 많이 한 우리 고유의 품종인데, 미국에서 많은 밀이 수입되면서 잊혀가는 듯하더니 2012년부터 진주에서 보관하고 있던 종자 덕분에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그 외에도 더 재밌는 얘기가 많지만 직접 찾아보시길 바란다.
그래서 '앉은뱅이 밀 바게트'는 '한반도 고유의 밀로 만들어낸 바게트'라는 뜻이다. 이 품종을 지금까지 지켜내 주신 분들께 감사를 올리며 입으로 가져가본다.
바삭
겉은 바삭하지만 그 속은 갓 쪄서 나온 백설기처럼 쫀득하고 촉촉하다. 와, 바게트에서 이런 맛이 난다니. 썰려서 식탁으로 나온 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빵 속의 수분을 가득 머금고 있다. 입안에서 쫄깃하게 느껴질 만큼 촉촉하고 쫀득한 바게트다. 일반적인 쌀로 만든 바게트보다 더 수분감과 쫄깃한 식감이다, 바삭한 감은 덜 하지만 이 빵을 씹었을 때 느껴지는 촉촉한 식감은 환상적이다.
'이거 한 입 먹을 때마다 조상님들께 큰절 한 번씩 해야겠구먼. 바게트가 이렇게 촉촉할 수 있나.'
그냥 먹고 있을 수는 없지, 바게트를 수프에 듬뿍 찍고 양파를 가득 담아 입으로 넣어본다. 촉촉한 바게트에 양파수프가 축축할 정도로 적시고는 양파를 올려서 먹는다.
"오오오..... 환상적인 수분감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다."
양파수프를 적신 앉은뱅이밀 바게트를 한 번에 씹으니 촉촉하고 쫀득한 바게트가 부드럽고 고소한 양파의 풍미를 잔뜩 머금고 있다가 내뿜는다. 수프와 빵 그릇에 풍덩 빠지고 허우적거릴 만큼 맛있는 맛이다. 양파수프와 빵의 매력에 이미 빠져버린 지 오래다.
10대 때 중국에서 양파수프를 즐겁게 먹던 나는, 30대가 되어 한국의 멜트인에서 양파수프와 빵을 더 맛있게 먹는다, 이제는 시간을 느긋하게 즐기면서 그 매력에 빠져.
식사를 마치고는 사장님들이 바쁘신 것 같으니,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니 따뜻한 햇살을 잠시 맞으며 문 앞에 앉아있던 고양이들을 지나쳐 주차해 둔 자전거에 시동을 건다.
애옹- 애옹-
"그렇게 울어도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없어."
나는 그렇게 문 앞을 지키는 고양이들 중에 머리가 가장 큰, 대장 고양이로 보이는 녀석을 바라본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얼굴이 반반 물든 녀석이다.
"네가 대장이구나? 다음에 또 보자."
범고래의 무늬를 가진 대장고양이는 식빵을 구운 자세로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다시 고개를 휙 돌린다.
'다음번에는 츄르라도 좀 들고 올까. 아냐, 고양이캔 같은 것이 더 좋으려나.'
맛있는 것을 혼자 먹고 나니 이쁜 여자가 떠오른다. 혼자 먹고 나면 괜히 미안해지는 것이다.
'이쁜 여자와도 함께 와야겠군. 따뜻하고 훌륭한 식사였어.'
회사로 다시 돌아오니, 나만 유럽여행을 잠시 갔다 온 듯한 기분이었다.
다정한 H팀장님이 나의 점심식사 안부를 묻는다. 그들은 함께 감나무집추어탕에서 추어탕을 먹고 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