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식일기] 원앙삼계탕, 강릉

삼계탕 집이라며, 왜 돌솥비빔밥이 맛있는건데!

by 김고로

대한민국에서 '구내식당' 혹은 직장 근처 '밥집'이라고 하면 대부분 10개 중에 9개는 한식을 기반으로 한 식당이다, 한식 메뉴 중 대표적인 찌개인 된장찌개와 김치찌개, 순두부찌개와 오징어볶음, 제육볶음 등 어릴 적부터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큰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는 메뉴를 구성해서 빠른 회전력과 가성비와 매일 만드는 반찬들을 무기로 장사를 하는 한식집, 읽으시는 분들도 이 정도로 얘기를 꺼내면 회사나 집 근처의 이런저런 작고 큰 한식집들이 생각날 것이다. 나도 지금 당장만 해도 회사와 집 근처의 이런저런 집들이 생각나는걸.


하지만 나는 점심때 한식 밥집을 잘 가지 않는다. 이유? 내가 파스타를 더 좋아해서? 아니다, 집에서는 주로 한식 메뉴로 아내와 저녁을 먹기 때문이다. 집에서 한식을 먹는데 굳이 바깥에서 외식을 할 때에도 한식집에서 한식을 먹을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 내 평소 지론이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다른 나라 혹은 다른 방식의 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직장 근처 바로 앞에 가성비 좋은 한식집인 '원앙삼계탕'이라는 식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어 번 가고 나서는 잘 가지 않았다. 가격도 매우 착하고 반찬 구성도 좋고 서비스도 친절하시다, 동료인 균과 가서 함께 먹었던 김치두루치기도 그럭저럭 맛이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잘 가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식당에 가지 않는 손님들의 단순한 이유와 같다 '갈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강릉에서도 나의 발길이 자주 닿는 한식 밥집들은 많이 없다, 그것은 나의 활동 범위가 심히 좁기도 하거니와 정말로 '가야 할 이유'가 있는 집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던 어느 날, 강릉에 추운 겨울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하던 날이었다.


나는 오후에도 업무를 조금 일찍 시작해야 하는 터라 회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식당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시간이 많이 남을수록 좋았기 때문에 회사 바로 앞에 있는 한식 밥집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원앙삼계탕'이라는 밥집, 간판만 보면 삼계탕 단일 메뉴로 장사를 하실 것 같지만 근처에 점심을 먹으러 올 직장인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한 것인지는 몰라도 삼계탕은 예약을 받아야 하시고 그 외에 두루치기, 비빔밥, 찌개류, 오징어볶음 등등 한식 메뉴들을 하는 그런 밥집. 거기에 부부이신 사장님들이 종업원들을 고용하지 않고 식당을 운영하시는 터라 가격도 착한 그런 밥집. 추운 날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다양한 맛의 든든한 식사류를 먹고 싶었다. 그래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홀을 보시는 남자 사장님께서 쟁반 위에 모시고 손님들에게 갖다 주고 있는 '돌솥비빔밥'이었다. 지글거리는 먹음직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그 음식이 나에게 '너 이거는 안 먹어봤지?'라고 하며 손짓했다. 좋다, 오늘은 너다, 돌솥비빔밥이다.


"사장님 여기 돌솥비빔밥이요!"


"네~ 물은 거기 정수기에서 알아서 떠 드셔요~!"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홀에 손님들이 앉기 시작하면 바쁘기 때문에 물은 알아서 떠먹는 것이 이 식당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뜨끈한 전기장판이 깔려있는 좌식 바닥에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같은 건물의 다른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와 근처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으신다. 건물에서 자주 뵙는 건물관리실의 직원분들이나 경비아저씨분들도 얼굴이 보여서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지나친다. 주방에서는 사장님들이 요리를 하는 소리가 들리고 벽걸이형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소리가 라디오처럼 중얼거린다. 그리고 내가 주문한 돌솥비빔밥이 큼지막한, 검은 윤택이 흐르는 돌솥에 담겨 나온다.


지글지글 파지지지직


돌솥에 담아놓은 쌀밥이 돌솥 안에서 고온과 약간의 기름을 만나서 누룽지 혹은 튀김처럼 바삭바삭하게 튀겨지듯이 구워지는 소리가 난다. 함께 나온 소박한 반찬 친구들과 맑은 미역국, 그 옆에서 주인공을 차지한 돌솥비빔밥은 매우 오랫동안 구워지는 소리를 내었다.


강릉 원앙삼계탕 돌솥비빔밥 1.jpg 원앙삼계탕의 돌솥비빔밥과 반찬. 삼계탕보다 다른 식사메뉴가 더 많이 판매된다. 감자조림과 참나물, 마른 멸치와 새우, 지진 두부와 김치, 맑은 미역국 등 모두 맛이 좋은 반찬이다.

'와, 돌솥비빔밥 그릇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소리.... 가뭄의 빗소리만큼이나 반갑군.'


나는 바로 돌솥비빔밥을 숟가락으로 뒤적거리며 비비기를 택하기보다는 아직 돌솥에서 지져지고 있는 밥알들이 더 바삭하게 구워지고 튀겨질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


'더 맛있게 익으라고, 밥알 동무들. 노릇노릇하게 익었을 때, 그때 보자.'


그리고 나는 맑고 짭조름한 맛이 나는 미역국과 새콤 고소한 참나물, 포슬포슬하고 매콤한 감자조림과 매콤 달콤한 마른 멸치와 새우, 부드러운 두부지짐 등 오늘 나온 반찬들을 한입씩 먹으며 인사를 나누고 다시 돌솥비빔밥으로 돌아왔다. 쌀밥들이 돌솥에서 구워지는 소리가 조금씩 줄어갈 때 즈음, 이때가 비비기를 시작할 순간이다!


강릉 원앙삼계탕 돌솥비빔밥.jpg 원앙삼계탕의 돌솥비빔밥, 고기도 없고 화려하지 않다. 애호박, 콩나물, 무생채무침, 고사리, 김가루에 달걀노른자. 하지만 거기에 바삭한 밥알과 양념장이 더해지면 어떨까?


파삭 파사삭


버석버석


숟가락으로 밥을 밑바닥까지 밀어 넣어 밥들을 살며시 긁어내면서 비빔밥 고명들과 양념, 달걀노른자를 깨트려가며 돌솥비빔밥의 시작을 알린다. 이미 짙거나 옅은 갈색으로 누룽지가 되기 직전까지 내가 기다려준 밥알들이 사각사각거리면서 그 모습들을 드러내고 이제는 액체가 되어버린 노른자가 밥알 사이사이, 고명들 사이사이로 흘러들어 가고 돌솥의 열기와 만나 맛있게 익어간다. 양념도 한 곳으로 뭉치지 않도록 바삭한 밥알들을 숟가락으로 가르면서 양념장을 고루 비비고 밥알에 묻혀나간다.


강릉 원앙삼계탕 돌솥비빔밥 5.jpg 달걀노른자가 익어가고 하얀 쌀알에 양념이 묻어간다, 새로운 옷을 입는 쌀알들.


밥을 다 비비고 나니 거뭇거뭇하게 익어버린 누룽지밥과 돌솥에 가까이 있지 않아서 누룽지가 되지 않은 하얀 쌀알들이 사이좋게 고명과 달걀노른자와 양념장으로 치장을 한 채 나의 손놀림을 기다리고 있다. 누룽지밥과 양념, 채소들, 이 녀석들이 서로 입안에서 어떠한 조화를 이루는지는 먹은 사람만이 알고 있다.


강릉 원앙삼계탕 돌솥비빔밥 3.jpg 다 비벼졌으니 이제 맛을 볼 차례이다

바사삭 아사삭


사각사각


누룽지처럼 구워진 밥알들이 입안에서 알알이 과자처럼 바삭하게 씹히고 그 위로 나물들이 아삭거린다, 그리고 달착지근하고 매콤한 양념이 맛과 향을 돋우는 것은 보너스. 돌솥비빔밥의 밥알들, 누룽지처럼 바삭하게 익은 쌀알들이 끝까지 바삭한 식감을 유지하며 씹히는 것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에서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행복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요 근래에 이렇게 맛있는 돌솥비빔밥을 하는 곳을 본 적이 있는가.


강릉 원앙삼계탕 돌솥비빔밥 4.jpg 사진만으로도 바삭해 보이는 저 밥이 보이는가? 입에 넣고 씹는다고 상상해 보자 '바삭'


'돌솥비빔밥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음식이야. 돌솥은 뜨겁워서 밥을 잘못 지으면 금방 눌어붙고 굳어버리기 쉽지. 하지만 처음부터 밥을 워낙 잘 지으셔서 밥들이 돌솥에서 튀겨지듯 구워졌지, 눌어붙지는 않았어. 오히려 달걀과 양념장이 눌어붙었으면 붙었지.'


돌솥의 바닥을 숟가락으로 살살 긁어먹으면서 나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한식집으로서 아주 훌륭한 밥을 짓고 계시다는 점이 나의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하기 시작했다. 설익지도 않고 질지도 않은 딱 좋은 밥, 돌솥 안에 기름을 살짝 발라서 고르게 펴두면 맛있게 누룽지처럼 익는 완벽한 밥. 한 숟가락을 더 떠먹으니 다시 누룽지밥과 쌀밥의 바삭함과 부드러움, 구수함과 달달함이 함께 밥만으로도 기분 좋은 식감을 만든다. 거기에 고명과 양념은 그야말로 식감과 풍미 보너스.


강릉 원앙삼계탕 돌솥비빔밥 6.jpg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린 탓에 조금 탄 곳도 있지만, 밥이 탄게 아니라 양념이 탄 거라 더 맛있다


'적당한 찰기의 밥에 적당한 양의 기름을 돌솥에 발라서 느끼하지도 않고 너무 건조하지도 않게 균형 잡힌 바삭함을 선사하는 이 기술..... 매력적이야, 고백할 뻔했어. 밥이 눌어붙지 않으니 무거운 돌솥을 벅벅 긁으면서 설거지하는 손목의 부담도 줄어들지, 효율적인 기술이야. 이 쉽지 않은 음식을 이렇게 맛있게 하시다니... 존경스럽다.'


누룽지밥에 이어서 사각거리는 애호박과 무생채와 콩나물, 쫄깃한 고사리에 달착지근하고 매콤한 양념장이 간을 딱 잡아주고 부드럽게 익은 달걀이 식감과 다양한 풍미를 더해주니 이렇게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돌솥비빔밥이 있나. 뜨거운 밥에 채소와 양념장과 달걀을 비벼 먹는 음식일 뿐이었던 돌솥비빔밥이, 원앙삼계탕에서는 새로운 음식이 되었다. 어.... 잠깐, 여기 삼계탕집이잖아. 근데 왜 돌솥비빔밥이 맛있는건데!


밥알을 한 톨까지 남기지 않고, 돌솥에 눌어붙은 양념장과 달걀까지 싹 긁어먹고는 그래도 더 먹고 싶어서 아쉬운 마음에 한참을 어두운 돌솥을 바라보다, 그 어두움이 나를 바라볼 즈음에 나도 일어섰다. 주방에 찾아가서 계산을 해달라고 사장님을 부른다.


"사장님~!"


"네네~ 카드로 계산이여?"


카드를 쓱 건네어드리면서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감사함도 함께 건넨다.


"이렇게 돌솥비빔밥이 맛있는 줄 알았으면 더 자주 올 걸 그랬어요."


말투에서 충청도 사투리의 억양과 느낌이 느껴지는 사장님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살며시 번진다, 사장님의 양뺨이 살짝 붉어지는 것은 기분 탓인가. 그냥 밥만 먹고 계산만 할 것 같은 사람이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칭찬을 하니 놀라우신가. 나를 쓱 보신다, 마침 나는 정장을 잘 차려입었는데, 알아보시려나?


"아, 요 앞에서 일하시는 분 아녀?"


와, 역시 식당 사장님들 얼굴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한다니까. 이걸 알아본다고? 하긴, 마지막으로 왔을 때도 같은 복장으로 방문을 했었다.


"네, 맞아요, 이전에 두어 번 왔었어요. 앞으로 자주 봬요."


"그려요, 또 와요."


그렇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다음 날 다시 돌솥비빔밥을 먹으러 갔을 때 사장님은 무언가 오래된 단골손님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식당에 막 들어와서 옷을 놓고 물을 떠다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으니,


"자주 와봤으면 물도 혼자 떠다 먹고 그려~ 여기서는 다 그려~"


환상적인 돌솥비빔밥을 다 먹고 계산을 하려고 사장님을 부르니 카드로 계산하는 법을 알려주시며,


"우리 바쁘면 그냥 카드 꼽고 대충 긁고 가~ 내가 믿응께~" 하신다.


하루 만에 갑자기 단골손님과 같은 대접을 받으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여하튼 앞으로 자주 올 것이니 미리 단골손님 대우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