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출퇴근 길로 자주 사용하는 임당동의 먹자거리, 그곳에는 강릉에서 육개장으로는 제일 유명한 '육반장'이 자리 잡고 있다. 강릉의 본점을 시작으로 여러 다른 지역에도 체인점이 있을 정도로 맛이 좋은데 사실 나는 이 육반장 집에 육개장을 자주 먹으러 가지는 않았었다.
내가 자주 가지 않는다고 해서 맛있는 집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저 나에게는 육개장이 선호하는 음식이 아닐 뿐인 것이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따라 팔당댐과 양평 등 경기도 외곽 지역으로 드라이브를 따라다니다 보면 국도에 자리 잡은 작은 휴게소 등에 항상 있는 메뉴가 육개장이었다.
드라이브를 시작하면 거의 저녁을 먹기 전에 출발을 하시는 터라 저녁 7시 정도가 넘어가면 나의 배꼽시계는 정확하게 울렸고 우리는 길 위에 있는 여느 휴게소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외곽의 국도에 있는 휴게소라 그런지 화물차 운전기사분들이 많이 방문하니 국밥이나 육개장 같은 뜨끈하고 든든한 음식들이 많았다.
어느 날은 휴게소 식당에서 주문을 받으시던 어르신께서는, 엄마의 드라이브를 따라온 꼬맹이가 간단히 국밥이나 시키겠지라고 생각하셨었는지 내가 '육개장'을 주문했을 때 잠시 신기하다고 바라보시고 나서 내가 육개장을 깨끗하게 혼자 다 비워내고 나니, 눈을 휘둥그레 뜨시고는
"저걸 혼자 다 먹네?"라고 하셔서 어렸던 나는,
"여기 육개장 맛있어요"라고 웃으며 답하니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밥 안 모자라냐, 더 줄까 물어보시던 기억이 있다. 지금보다 어렸던 나였을지라도 '맛있다'와 '맛없다'에 대한 생각과 음식에 대한 욕망은 확실했다 보니, 그 휴게소에서 팔던 육개장은 분명 맛있는 음식이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하지만 자라면서 나의 외국 생활이 시작되었고 육개장은 외국에서는 한인 식당을 방문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라 나의 애정을 받는 음식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속초에서 살 때에 속초고속버스터미널 근처 '풍년육개장'이라는 육개장 집이 있었는데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부드럽고 진한 육수맛이 좋아서 곧잘 갔었지만 강릉으로 옮겨오고 나서는 몇 년 동안은 육개장을 먹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육개장 집에 대한 글을 쓰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육반장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강릉에서도 오랫동안 영업을 해 왔고 위에서 얘기했듯 여러 체인점이 있을 정도로 맛은 어느 정도 괜찮은 집이다. 다만, 내가 잘 가지 않았을 뿐. 시내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전보다 조금 더 방문하게 되었고 이제는 안 먹은 지 시간이 좀 지나면 이따금씩 생각이 나서 혼자서라도 방문해서 먹는 집이다.
글을 쓰려고 생각하면서도, 육반장에 혼자 앉아 육개장을 시켜놓고 먹으면서도 생각을 해본다.
'육반장 육개장의 매력은 무엇인가?'
육반장의 붉은 육개장, 매장에서는 '빨간 거'로 불린다
한동안 이 질문에 대해서 (내가 육반장 사장도 아닌데 대체 왜) 자답을 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문득 답이 생각이 났다. 직장의 오전 근무 시간에 갑자기 육반장에 가서 육개장 국물을 들이켜고 싶어졌다.
나는 자문했다,
'왜 그럴까? 왜 육반장 국물이 먹고 싶을까?'
그리고 또 다른 내가 빠르게 대답했다.
'육개장 국물, 그 국물 맛있잖아. 고소한 국물, 잊지 못해서 생각이 나는 거지.'
그렇다, 정답이었다. 다른 육개장들과 차별되는 육반장의 육개장 국물, 끝까지 고소하고 부드러운 그 국물, 먹으러 가자. 나의 자아가 소리쳤다.
'육반장 육개장 칼국수 먹으러 가자!'
그렇게, 오전 근무가 끝나고 나서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다시 홀로 밥을 먹으러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전거를 몰고 임당동으로 향하는 나.
낡아 보이는 간판 '육반장',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은 홀에 붉은 유니폼을 맞춰 입으신 여사님들께서 '어서 오세요' 합창하신다. 이미 점심시간에 맞춰 육개장을 한 그릇씩, 땀을 닦으면서 드시고 계신 손님분들이 많다.
"몇 분이세요?"
"혼자예요. 어디 앉을까요?"
"저기 마음대로 앉으세요, 아직 손님도 많이 안 들어왔는데."
매일 점심시간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앉아있는 육반장의 풍경이지만 오늘은 아직 이른 점심시간이라 자리가 많아서 나는 근처 널찍한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생님, 육칼 하나요!"
"홀에 칼 하나!"
육개장 칼국수를 주문하고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육개장 칼국수를 먹고 나서 배가 안 부르면 어쩌지?'
내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또 외친다.
'공깃밥을 하나 더 시켜서 밥 말아먹으면 되지!'
와, 누구인지 몰라도 천재가 틀림없다. 그래, 배가 안 부르면 공깃밥을 시켜서 말아먹자.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인생을 빼고는 다 말아먹어도 되지 않겠는가. 냉면과 물회에도 밥을 말아먹는데 (내가 그런다는 건 아니다) 육개장 칼국수도 밥을 못 말아먹겠는가.
"칼국수 나왔어요~"
'빨간 거'에 살짝 도톰한 칼국수면이 들어가 있다.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육개장. 매콤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스멀스멀 코 안으로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파릇파릇한 대파의 겉 부분과 뽀얀 속 부분이 큼직큼직하게 쌓여 검붉은 양지머리와 함께 칼국수 위에 누워있다. 내가 좋아하는 육개장의 식사방식은 우선 파들을 먼저 먹는 것이다. 이미 대파의 매콤하고 얼얼한 맛은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뜨거운 육수에 갓 익어서 향긋한 대파의 향과 익은 대파의 달콤함, 그리고 부드러운 맛이 아직 공존하고 있는 그때에 대파들을 먼저 입으로 가져간다.
대파들이 큼직하게 썰려있다
사각사각 아작아작
육개장 국물에 익은 대파가 입안에서 씹힐 때마다 대파의 향이 코로 향긋하게 올라오며 입안에서는 달콤한 대파의 즙이 퍼진다. 스페인 사람들이 대파를 괜히 숯불에 까맣게 구워서 먹는 게 아니라니까, 이 향긋함과 달콤함 때문에 대파를 구워 먹는 거겠지. 육개장에 대파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넣어주는 것이 참 좋다.
고소하고 걸죽한 육개장 국물
그리고 이제 육개장 국물을 한 입 먹어본다.
후룹
"크으.... 이 맛이지, 이 칼칼하며 고소한 이 맛."
육반장에는 두 종류의 육개장이 있다, 여러분들도 아는 그 붉은 육개장 그리고 고춧기름이 들어가지 않은 하얀 육개장도 판매한다. 전통적인 붉은 육개장은 매콤한 고춧기름이 지도 위의 대륙들처럼 큼직하고 투명하게 떠 있는데, 그것과 함께 국물을 떠서 먹으면 고춧기름의 매콤함과 진하게 우려낸 국물 자체의 고기육수의 맛과 고소함이 훌륭하다.
육반장의 하얀 육개장, '하얀 거'. 더 진한 육수맛으로 '빨간 거'와 차별을 둔다.
식당마다 육개장 국물의 스타일이 다른데, 육반장의 육개장 국물은 고기육수 자체의 진하고 고소한 맛과 걸쭉한 농도를 만들어주는 다량의 깨소금의 극강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져서 계속해서 구미를 당기게 한다. 갓 짜셔 나온 참기름이나 들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한없이 자극하듯이, 그 고소한 맛과 진한 고기의 맛이 매콤한 국물과 함께 혀와 입안을 적실 때에 육반장의 독특하고 걸쭉한 이 국물에 매료된다.
"한 입을 먹고 나면 또 안 오기 힘들어.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한 번만 오는 사람을 없을 거야."
혼자 이런저런 말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계속 국물을 떠먹는다. 걸쭉한 농도와 고소한 맛이 멈출 수가 없다.
"어이쿠, 이렇게 국물만 먹다 보면 나중에는 칼국수가 아니라 비빔칼국수가 되겠어. 면발을 먹어볼까."
매콤하고 걸쭉하고 고소한 육개장 국물이 칼국수가 살짝 붉은빛으로 영글거릴 만큼 국수에 잘 배였다. 아직까지 칼국수가 찰랑찰랑 거리는 것을 보니 국수가 잘 삶아졌다. 나는 젓가락으로 국수와 옆에 걸리는 얇은 쇠고기를 몇 개 집어서 한꺼번에 입안으로 가져간다.
면이 많아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양이 충분하다
부드럽고 찰랑거리는 칼국수와 함께 쫄깃한 쇠고기에서 육개장의 육수가 뿜어져 나오니 이것 또한 육개장 칼국수를 먹는 즐거움이다.
향긋하고 달콤한 파, 매콤하며 고소하고 진한 육개장 국물, 쫄깃한 쇠고기 트리오의 손발이 척척 맞는 삼중주. 영화 '식객'에서 왜 육개장으로 영화를 시작해서 마무리를 지었는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물론, 육반장의 육개장은 전통 육개장처럼 토란, 고사리 등등 많은 재료가 다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육개장의 매력을 뽐내기에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 매력은 오래된 영업년수와 다수의 분점으로 증명이 되었다.
나도 육반장 육개장의 고소한 매력에 빠져 꾸준히 방문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칼국수를 흡입하다 보니 금방 칼국수의 양이 줄어들었다, 이런, 벌써 다 먹었다고?
'밥을 추가로 주문할까? 국물을 다 먹고 결정해야겠군.'
나는 육개장 국물이 담겨있는 그릇을 들어 들이킨다, 곱게 갈린 깨소금들과 깨들이 입안으로 걸쭉하게 밀려들어와 고소함으로 팍팍 터진다. 그리고 나의 위장도 따뜻하고 든든하게 채워진다.
전반전에 건더기를 건져서 먹고, 후추를 살짝 첨가해서 먹는 것도 맛이 좋다. 후추의 향긋함이 육개장의 고소칼칼한 맛과 어우러져 '맛있음'을 증폭시킨다
'아니야, 국물을 마시니까 충분히 배가 부르군. 오늘은 이 정도면 됐어.'
나는 테이블 한 구석에 덩그러니 서있던 티슈를 몇 개 꺼내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슥슥 닦는다. 홀로 육개장 칼국수를 비워낸 대가는 입안에 남는 고소함, 위장의 따뜻함과 포만감, 그리고 이마의 땀방울.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가이다. 잠시 쉬면서 메뉴판을 바라보니 육개장에 순두부도 넣어준단다.
"다음번에는 육개장 순두부를 먹어볼까? 나쁘지 않겠는데? 아냐, 그래도 그냥 밥에다 먹는 게 더 나으려나."
누구도 관심이 없는데 혼자 즐거운 생각을 펼치는 나였다. 무슨 생각을 하든지, 일보다는 즐거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