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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Mar 04. 2023

[미식일기] 진량돼지찌개, 경산

친근하고 달콤한,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한 찌개

'[미식일기] 커피고래, 경산'편에서 언급했다시피, 커피고래에 머물러 있었던 오전과 오후 사이의 점심시간, 이쁜 여자와 나는 미리 예약해 두었던 진량돼지찌개를 다녀왔다. 존경하는 백선생님의 유튜브 채널과 몇몇 블로거들의 경험담을 보니, 이전보다 손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이제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매장에서 먹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있어서 나는 출발하기 전에 미리 전화를 드려서 예약을 해둔 터였다. 전화를 걸어보니 약간의 신호음이 울린 후에 사장님께서 전화를 받으신다.


[여보세요....]


약간 쉬고 푹 잠긴 목소리,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느낌, 마침 쉬는 시간에 주무시고 계신 중에 내가 깨웠나 보다. 이런, 상당히 죄송하다. 하지만 이왕 전화를 받으셨으니 빠르게 예약을 하고 전화를 끊는 것이 낫겠지.


[여보세요, 돼지찌개 집인가요?]


[네, 진량돼지찌개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내일 점심시간 2인 예약을 하려고 하는데요, 가능할까요?]


[네.... 몇 시쯤 오시나요?]


[13시 30분에 2명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네... 1시 반에 2명 준비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다행히 식사예약이 가능해서 경산에서의 맛있는 점심은 확정이 되었다. 이왕 경산까지 가는 건데,  경산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을 방문해보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당일 밤늦게 경산에 도착해서 다음 날 이쁜 여자의 대학교 일정이 마치자마자 예약 시간에 맞추어 경산시 진량읍에 있는 산업단지 근처로 출발했다. 산업단지 옆에 있는 돼지찌개 밥집이라, 강한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허기진 배를 든든히 채워줄 밥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근처 골목에 차를 세우고 예약시간보다는 살짝 일찍 도착한 터라 산업단지 안에 있는 공원 주변을 이쁜 여자와 함께 산책하며 어떤 동네인지 잠시 살폈다.


산업단지이지만 경산에서의 두 번째 날은 비가 조금씩 내리던 궂은날에, 토요일인지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골목에는 한국인들과 외국인 노동자분들 몇몇이 산업단지 내에 위치한 외국식료품 상점 근처에서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 다니는 모습이었고 공원에서는 중앙아시아에서 오신 것으로 보이는 모자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산업단지 동네 한 바퀴를 마친 우리는 큰 길가에 자리를 잡은 진량돼지찌개 집으로 향했고 반투명 코팅이 붙어있는 문에는 백선생님의 유튜브를 보고서 식당을 방문하는 많은 손님들께 양해의 말씀을 구하고 있는 식당 사장님의 눈물 섞인 공지사항이 붙어있었다.


"사람들이 유튜브를 보고 와서는 이런저런 말을 많이 했나 봐."


"그러게, 상처를 많이 받으셨나 보네. 이렇게까지 공지를 붙여두신 것을 보니."


사실 내가 방문 전에 참고했던 어느 블로거는


'경산 근처에 왔을 때 한번 들리면 좋은 집'이라는


평을 남겼을 정도로 가성비와 솜씨가 좋은 동네 밥집이니 그 이상의 큰 기대를 갖고 오지는 말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랬다, 돼지찌개라는 이름을 가진 음식을 하는 곳은 많지 않으니 경산에 온 겸, 한 번 먹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쁜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나도 집에서 돼지고기와 고추장을 넣은 찌개를 많이 하는 편이라, 식당에서 파는 돼지찌개는 어떤 맛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장님이 바로 보시길래,


"안녕하세요, 저 한 시 반에 예약한 사람인데요."


예약을 하고 온 손님이라고 말씀을 드리니 사장님의 표정이 살짝 밝아지며 답을 하신다,


"네, 저쪽에 준비해 두었어요, 들어오세요."


사장님께서 안내해 주신 대로 자리를 잡고 앉으니 식탁 옆에 붙어있는 사장님의 당부인사와 돼지찌개를 맛있게 먹는 법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을 보아하니 예약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는 매일마다 여기 근처 일하시는 분들에게 점심, 저녁 장사하시는 곳인가 보네. 재료를 그날마다 쓸 만큼을 사서 쓰시고 하시나 봐. 그래서 예약을 해달라는 말을 하시는구나."


"그러게, 이전에는 이렇게 손님들이 많이 올 거라고 생각을 못하셨을 텐데, 갑자기 이렇게 되니 힘드셨겠다."


자리에 앉으니 사장님께서 금방 오셔서 각종 밑반찬들을 준비해 주시고 버너에 올려진 돼지찌개에 불을 붙이며 말씀하신다.


"돼지찌개는 제가 다 준비해 드릴 때까지는 만지지 말아 주세요. 제가 다 해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경고: 사장님이 말씀하시기 전에는 국자를 건드리지 마시오


안 그래도 식탁 옆 공지를 보니 국자는 찌개가 다 끓을 때까지 건드리지 말라는 당부를 해두셨다. 거기에 찌개는 적당히 끓어오르면 먹기 시작하는 것이 찌개에 들어간 대파의 풍미와 양념, 재료들의 맛이 알맞게 어우러진다는 말씀을 하시며 굳이 취향이 아니라면 오래 끓여서 졸여먹지는 말라는 친절하고 세세한 말씀까지 해주셨다.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신 것이 친절하고 섬세한 사장님의 배려다. 맛있게 먹는 법을 알려주신다는데, 안 따를 수 없지, 이럴 때에 나는 착한 어린이다.


어느 정도 느긋하지만 배가 많이 고픈 인내와 고난의 시간을 지나서, 사장님께서 오셔서 몇 번 돼지찌개를 저어 주시고는


"이제 드셔도 됩니다"라고 해주시니


나와 이쁜 여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며, 입안에는 저절로 군침이 돈다. 이른 오전부터 일어나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우리는 상당히 배가 고팠다. 마침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주신 밥의 양도 거의 한 공기를 가득 채우고 거기에 반공기를 더 주신 것과 같은 양이라 찌개를 먹고 나면 무조건 배가 부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찌개가 양이 많아 보이는데, 밥도 머슴밥을 주셨네."


"나는 이거 다 못 먹을 것 같아."


"그래,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먹어."


이쁜 여자와 나 중에 누가 어떠한 말을 했는지는 잘 아실 거라고 본다. 나는 우선 숟가락을 들어 잘 끓여진 돼지찌개의 맛을 본다.


먹을 수 있는 준비가 된 돼지찌개


후루룩


'오오.... 이 맛은....!'


찌개 국물 맛이 생각보다 가볍다, 대파의 풍미와 단맛이 가득 배였는데 거기에 달착지근하고 살짝 매콤한 고추장의 맛이 입안을 감싸 안는다.


"와, 국물 먹어봐. 굉장히 친근한 맛이야. 그런데 계속 끄는 맛이 있어."


"그래?"


이쁜 여자는 나의 말을 듣고 국물을 한 숟갈 먹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각자 한 숟갈씩 국물을 먹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할 시간이다.


매콤달콤 어묵볶음, 콩나물무침, 김가루, 매운 땡초와 양파, 고춧가루가 박힌 된장


나와 이쁜 여자는 각자 국자를 들어 대파와 건더기를 듬뿍 밥에 덜고는 고춧가루에 버무려진 콩나물무침과 김가루를 넣고는 사장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슥슥 비비기 시작한다. 돼지찌개로 만든 비빔밥이 많이 뻑뻑하니 국물을 더 넣어 조금 더 질퍽한 질감의 비빔밥으로 만들어본다. 그리고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안으로 가져간다.


김가루, 콩나물무침이 얹어진 돼지찌개 비빔밥


고슬고슬한 밥알이 달착지근하고 매콤한 국물을 머금어 진하고 감칠맛 넘치는 돼지찌개 국물과 파의 풍미를 내뿜고 그 사이로 아삭아삭, 바삭바삭 씹히는 콩나물과 김가루가 식감을 재밌게 만들어준다. 커다란 대파 조각을 씹으니 달콤하고 부드럽게 익은 대파의 맛 사이로 사근거리는 대파결의 식감이 벗겨지며 그 풍미가 코로 올라온다.


사장님의 가르침대로 잘 비벼진 돼지찌개비빔밥


"음.... 찌개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은 당연히 맛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더 맛있네."


"근데 이거 비벼먹으니까 양이 더 불어난다, 이거 한 끼 먹으면 누구나 배가 부르겠는데."


필자는 촉촉한 비빔밥을 선호하여 국물을 더 넣었다


찌개에 들어간 건더기와 1인당 주어진 밥의 양을 보니 현재 판매하고 있는 가격에 이 정도의 양이면 굉장히 후한 인심을 자랑하는 집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서 일하고 계신 노동자분들은 퇴근하고 나서, 여기에 소주도 한 잔 걸치시면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시겠지.


내가 어느 정도 밥을 다었을 때, 찌개 본연의 맛을 즐기고 싶어졌다. 비빔밥이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에 남은 국물과 건더기들을 퍼서 건더기마다 공략을 들어간다. '돼지찌개'라는 이름답게 작은 조각으로 채 썰어진 돼지고기가 잔뜩 들어가 있다. 한 움큼 퍼서 촉촉한 국물과 함께 씹어본다.


'물반 고기반'이 아니라 '대파반 고기반'이다


으적으적


고기에 기름이 많이 없어서 뻑뻑할 거라고 생각했던 고기의 질감은 생각보다 촉촉하고 쫄깃하며, 부드럽다. 입에서 걸리적거리지 않고 푹신푹신할 정도로 씹히는 식감에 구수하고 진한 돼지의 맛. 그래, 이래야 '돼지찌개'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뻑뻑하지 않은 것을 보니 앞다리를 사용하시려나? 내가 집에서 뒷다리로 찌개를 끓이면 부드럽지는 않던데, 앞다리로 찌개를 끓이면 이런 식감이었지. 이 앞다리를 직접 다 손질해서 전처리를 하시려면 쉽지 않으시겠는데.'


찌개에서 돼지고기와 파가 끝도 없이 나온다, 마법찌개인가.


부드러운 돼지고기가 이제는 살짝 되직해진 매콤 달콤한 국물과 어우러져 고기를 씹을 때마다 찌개의 양념맛이 입안으로 흘러나오는 기분이 좋다. 아, 비벼먹지 말고 찌개랑 밥을 따로 먹을 걸. 만약 다음에 또 이 집에 온다면 반드시 밥과 찌개를 따로 먹어보리라. 그리고 라면 사리를 추가로 넣는 것보다는, 사리 없이 조금 더 맑은 형태와 찌개 양념 본연의 맛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라면사리에서 우러나온 전분이 국물로 스며들어 온전한 양념의 맛을 침해하고 국물을 더 무겁게 만드는 것은 나의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찌개에 들어간 건더기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 돼지고기, 마늘, 대파, 당면, 끝. 양념장이나 세세한 고춧가루 등을 제외하면 많은 재료가 들어가는 것이 아닌데 이 맛있는 훌륭한 쿼텟이 서로 매콤함, 단맛, 감칠맛으로 어우러진 호흡을 맞추며 즐거운 풍미를 뽐내고 있었다.


'그렇지, 재료의 종류를 많이 넣는다고 해서 맛있는 것은 아니야. 중요한 것은 재료들 사이의 풍미의 균형이지.'


입안의 돼지고기와 대파를 쉬지 않고 씹으며 부엌을 바라보니 사장님의 어머니로 되어 보이시는 분께서 굉장히 피곤하고 지친 얼굴로 점심장사를 마감하고 계셨다. 부엌 안에는 커다란 고무대야 안에 푸릇푸릇한 대파조각들이 헤엄을 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 눈에 보이는 대파의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매일마다 준비하시겠지.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닌걸. 조용히 주변 동네분들 대상으로 밥집을 하시던 분들이, 어느 날 갑자기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사람들과 가게 바깥으로 늘어선 손님들을 보았을 때, 어떤 기분이셨을까.'


가게를 찾아주시는 손님들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사장님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손님들의 수는 대부분 매출의 증가로 이어지니까. 하지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만큼 준비해야 하는 음식의 양과 재료, 그리고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니까.


잠시 심각한 생각으로 빠졌다가 다시 한번 흡입한 돼지찌개 국물 한 숟갈이 나를 다시 현실세계로 불러온다. 이 매콤달착지근한 감칠맛이 계속 나의 입을 당긴다, 나의 입맛을 자꾸 잡아당긴다. 분명히 처음 먹어보는 맛인데, 너무나 친근해서 이미 오래전에 어디선가 먹어본 것과 같은 맛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겨우 만난 친한 친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돼지찌개는 오랜만에 만난 친한 친구 같은 맛이야."


"무슨 뜻이야?"


돼지찌개 잘 먹다가 내가 헛소리를 하자 이쁜 여자가 바라보며 부연 설명을 요구한다.


"어디선가 먹어본 것 같은 친근한 맛인데, 분명 처음 먹는 찌개잖아."


"그렇지."


"꼭 초등학교 동창회에 오랜만에 나갔는데 어릴 적 정말 친했던 친한 동창을 만나는 맛이랄까."


"아하..."


"그만큼 친근하고 사람을 당기는 맛이라고.."


"그렇구나."


식사를 마치고 나니 왜 백종원 선생님이 맛이 좋다고 평을 하셨는지, 나는 어느 정도 동감이 되었다. 내 입맛에도 진량돼지찌개의 돼지찌개는 매력적인 음식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친근한 동창 찌개가 가능한 오래 영업을 하기를 바라며, 이쁜 여자와 나는 다시 커피고래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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