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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Sep 02. 2023

[미식일기] Phonatic, Adelaide

쌀국수에 미쳐버린 사람들이 우려낸 육수의 달콤함

오전에 숙소인 누나의 집 근처의 브런치 카페인 Froth & Fodder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우리는 애들레이드의 시내로 향했다. 호주의 주요 대도시들은 시내와 거주지가 아주 명확하게, 선을 그어놓듯이 구분되어 있는 편인데 누나의 집이 있는 쿠랄타 파크에서 20분 정도 차를 타고 우리는 오후 일정을 향해 달렸다. 우리가 서로 가보자고 동의한 장소는 마침 멕시코의 유명 예술가인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등 멕시코 근대 예술가들의 특별전이 펼쳐지고 있는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아트 갤러리 오브 사우쓰 오스트레일리아, 남호주 미술관)였다.


근대에서부터 존재하던 건물들의 외관과 내관을 보수하거나 리모델링하여 사용하는 호주의 특성상 고대의 건물 혹은 미술관과 같은 건물을 가진 남호주 미술관에서 음식만큼이나 다채롭고 기억에 남는 멕시코 미술가들의 전시를 관람했다, 마침 애들레이드를 방문하고 있던 도중에 이쁜 여자가 좋아하는 예술가의 전시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여행의 운이 따라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우리는 애들레이드에서는 필터커피와 비슷한 'Batch' 커피를 한다는 'Elemental'이라는 카페에 들러 싱글 오리진을 한잔 하며 여유를 가진 후 누나가 추천하는 동남아 음식점들 중에 시내에서 가깝게 갈 수 있는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을 골라서 향했다. 누나의 가까운 지인 중에 동생이라고 부르며 집에서 요리한 음식도 서로 나눠 먹는 베트남인 동생이 알려준 베트남 음식점 중에 하나라고 말했다. 매형과 누나도 곧잘 가던 음식점이라고 했고, 소고기가 비교적 저렴한 호주의 특성상 고기육수를 맛있게 우려서 쌀국수를 말아주던 10년 전 호주에서 먹던 베트남 쌀국수의 향수를 성불시키기 위해 우리는 시내의 어느 먹거리 골목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아직 안 끝나서 다행이네."


나와 이쁜 여자를 대신해서 우리가 목적으로 한 음식점의 점심시간을 검색하던 누나가 읊조렸다. 호주 식당들의 점심 영업시간은 주로 12시부터 2시 반 혹은 3시라서 각 식당, 지점마다 영업시간을 잘 알아보고 가야 한다.



키 큰 회색빛 콘도식 호텔 앞에 자리 잡은 현대식 바 혹은 펍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검은색과 짙은 나무빛깔의 외관과 내관을 가진 베트남 음식점. 길 위에 'Phonatic'이라는 글자와 함께 베트남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인 반미의 그림을 그려놓은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Phonatic'이라는 말은 베트남어로 쌀국수를 뜻하는 'Pho(포)'와 정신적으로 병이 있거나 미친 사람을 뜻하는 'Lunatic(루나틱)'을 합쳐서 만든 합성어로 보였다.


구글로 검색을 조금 해보니 꼭 호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곧잘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에 사용하는 상호다. 사실 그만큼이나 베트남 쌀국수에 미친 사람들의 미친 맛을 자랑하는 음식을 판다는 이야기로 나는 받아들였다.


"여기 사장님이 지금은 머리숱도 많이 없으시고 살도 많이 찌신 중년의 아저씨이지만 이전에는 이 동네에서 유명한 베트남 갱의 꽤나 높은 분이셨다 하더라고."


그렇다, 어느 나라에도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있듯이 호주도 그렇다. 화교분들만큼이나 베트남 이민자들도 수가 상당히 많은데, 그들이 뭉쳐서 베트남 폭력조직이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생계를 위해서 술집, 식당이나 카페 등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걸 드러내듯이 Phonatic은 점심, 저녁에는 베트남 음식점, 그 이후 늦은 밤 시간에는 주류와 안주를 주로 판매하는 술집으로 변한다.


"역시, 여기도 베트남 갱이 있구나. 멜버른도 그랬잖아."


"그렇지, 여하튼, 실제로 만나서 얘기해 보면 넉살 좋고 인심 좋은 동네 아저씨야. 대인배이기도 하고. 소문으로는 전 여자친구가 찾아와서 술병으로 머리를 쳐서 병이 깨질 정도로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는데 그냥 '허허' 웃으면서 받아주고 보복도 안 했다고 하더라고."


"허어....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네."


만약 누나가 나에게 이야기해 준 소문이 사실이라면 Phonatic의 사장님이 되시는 분은 금강불괴를 통달한 달마대사의 현신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누나의 설명을 들으며 가게 안 쪽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나는 나무로 된 마룻바닥과 장식, 바를 돌아서 창가 자리에 우리는 앉았다. 여름철 계절메뉴로 복숭아 에이드나 갓 짜내린 사탕수수 음료 등 동남아에서 맛볼 수 있는 음료도 파는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가 호주를 방문하는 시점은 호주의 겨울이었기 때문에 맛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그래도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뜨끈하고 진한 쌀국수 한 그릇으로 위로를 받을 생각에 기쁘기만 했다.


나는 소고기 완자, 양지머리, 사태가 들어간 쇠고기 쌀국수인 '반포남', 이쁜 여자는 나와 같은 육수에 건더기만 해물로 바뀐 쌀국수, 누나는 매콤한 고기 육수에 녹두로 만든 쫄깃한 국수가 들어간 '봄보후에'를 각자 주문했다. 사실 반미나 반세오 같은 음식들도 먹고 싶은 욕심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베트남 사람들이 요리해 주는 진한 쇠고기 육수가 가득한 쌀국수가 호주에서 먹고 싶은 음식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다른 음식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나는 반포남으로 마음을 굳혔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서너 명으로 이루어진 식탁도 있는 반면에 혼자서 점심을 먹으러 온 사람들도 꽤 있어서 이 집이 꽤 괜찮은 맛을 가진 집일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혼자서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으면 인정이지.


미리 준비된 육수에 고명이 있을 테니 쌀국수만 다 삶아지면 금방 나오는 음식이지만 우리보다 먼저 온 팀들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린 후에 우리는 주문한 쌀국수를 맛볼 수 있었다. 예상한 것보다 조금 더 진한 고기육수의 투명한 빛깔, 하지만 그 육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미는 우리나라의 유명 국밥집 혹은 갈비탕 집의 육수에서 솟아오르는 냄새와 비슷한 달콤함.



이미 브런치 카페에서 든든하게 챙겨 먹었고, 커피도 한잔 먹고온 몸이지만 얼굴까지 일렁이는 투명한 고기육수의 향기에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참을 수가 없다. 얼른 함께 나온 바질 몇 장과 고수를 몇 가닥 넣어주고 레몬즙을 살짝 뿌린다. 쇠고기 육수의 맛을 필요 이상으로 침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추가적인 고명을 많이 넣지 않았다. 일단, 국물을 살짝 몇 번 숟가락으로 들어서 입과 혀를 적신다.


"오우.... 이 맛이 그리웠지."


깊은 달콤함이 입안을 적신다, 나는 젓가락을 들어 쌀국수를 한 움큼 잡아 올려 그대로 흡입한다. 육수와 기름이 묻어 반질거리는 쌀국수가 출렁이며 내 입술을 매만진다.


후루루루룩


"크으으..."



나는 눈을 감고서 쌀국수 면발의 부드러움과 찰랑이는 느낌을 느끼고, 거기에서 묻어 나오는 육수의 단맛과 깊은 풍미를 씹는다. 그리고 다시 그릇을 조금 높이 들어 입까지 올린 후 육수를 많이 마셔본다. 가벼운 듯, 하지만 진하고 묵직한 맛이 깊게 내려오는 달콤한 고기의 맛. 한국에서 경험했던 많은 수의 베트남 쌀국숫집들의 육수는 나에게 고기의 맛이 어느 정도 첨가되어 있는 물과 같이 느껴져서 아쉬웠다면, 내가 속초에서 경험했던 매자식당, 서울의 온수반이나 Phonatic 등 육수를 진하게 우려내는 집들은 고기가 녹아서 물이 되었다고 얘기하고 싶을 정도로 육수에서 단맛과 감칠맛, 묵직하고 깊은 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전에 백종원님이 지금만큼 유명하지 않았을 무렵, EBS 교육방송의 테마세계기행, 아틀라스라는 프로에서 베트남의 미슐랭 별을 받은 쌀국숫집에 찾아간 방송을 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백종원님이 육수 맛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해당 베트남 쌀국숫집의 사장님은 머리를 긁적거리시며,


"이걸 비결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냐만, 고기를 아낌없이 넣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그렇다, 맛있는 육수는 고기와 뼈가 아낌없이 들어가서 우러나온 육수다. 살코기로 우려낸 육수를 쓰거나, 뼈로 우려낸 육수를 쓰거나, 아니면 그 둘을 잘 섞어서 쓰거나 하는데 베트남 쌀국수는 주로 살코기의 육수를 내어 깊고 달착지근한 맛의 육수에 쌀국수를 말아주는 곳이 많다. 그래서 베트남 쌀국숫집들을 가면 주로 주방에서부터 나오는 쿰쿰한 고기 삶은 냄새가 손님들을 먼저 반기는 것이다.


"아, 이게 쌀국수지, 이게 고기 육수지."


"해물 넣은 것도 맛있어, 육수가 깔끔하고 달다."


봄보후에, 매콤한 고기육수에 녹두로 만든 쫄깃한 면이 특징이다


뜨거운 그릇 아래에 보물처럼 넣어놨던 적양파들과 숙주나물이 알맞게 익어가면서 시원하고 깔끔한 맛을 더하기 시작한다. 쇠고기 육수의 깊고 진한 맛에 그 끝에 지방의 고소한 잔여미도 혀에 남아서 달달한 감칠맛에 더 즐거움을 더한다. 육수를 마셨으면 다시 한번 쌀국수를 쳐올린다.


후루루루룩


맛있는 고기육수는 설탕처럼 달콤하다, 묘한 감칠맛 그리고 풍부한 풍미. 거기에 잘 삶아진 양지머리와 사태를 들어 올린다, 육수를 머금어 햇빛에 비추이니 일곱 무지개 색깔이 영글었다. 보는 것만으로는 맛을 모른다, 치아로 씹어봐야 한다. 쫄깃쫄깃하고 결이 살아있다, 치아 사이에서 고기가 살아있는 듯이 춤을 추다가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하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다, 고기가 비교적 저렴한 나라에서 쌀국수를 먹는다는 것은 많은 쌀국수 안에 가득 들어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반짝이며 빛나는 쇠고기


누군가는 쌀국수의 고기를 스위트칠리나 해선장 등에 찍어먹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고기는 고기 그대로 그 맛과 식감을 좋아하기 때문에 잘 삶아진 그대로 푹신하고 쫄깃한 고기의 식감을 씹고 즐긴다. 쇠고기가 아낌없이 들어간 쌀국수 안에서 달콤함과 감칠맛의 음표들이 쉼표 없이, 끝까지 연주된다.


아삭아삭 사각사각


쌀국수의 고기와 쌀국수, 육수의 연주를 잠시라도 멈출 수 있는 것은 양파와 숙주나물의 아삭거리며 부서지는 식감과 소리뿐, 고수에서 터져 나오는 독특한 향기가 거기에, 청중의 박수소리를 섞어 넣는다. 맛있는 음식이 나를 위해 연주하는 콘서트는 언제 먹어도 즐겁다.


뜨끈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저녁에는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기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누나, 이쁜 여자와 나는 저녁에는 또 어떤 맛있는 음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지 의논한다. 일단은 집으로 잠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애들레이드 시내로 나오기로 하였다. 쌀국수를 먹고서 미식에 미쳐버린 사람들처럼, Phonatic이라는 가게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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