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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Sep 30. 2023

[미식일기] 평진냉면, 강릉

막국수 나라의 평양냉면, 냉면 밖에 할 줄 모릅니다, 믿어주세요

강릉에서 살다 보니 서울 혹은 수도권에서 주로 살다가 강릉으로 이주해서 살고 계시는 분들을 많이 알게 되는데, 강원도 외의 다른 지역에 가면 막국수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강원도에서는 냉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내가 부산에서 배달어플을 이용하여 '막국수'를 검색할 때면 닭갈비집이나 족발집만 수두룩하게 나오고 막국수 전문점은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강원도에 와서 '냉면'을 검색하면 괜찮은 평양냉면 집은 잘 찾아볼 수 없다.


"콤마님, 근처에 괜찮은 평양냉면 집이 없을까요?"


"음...."


자주 찾아가는 카페인 '펌킨오울'의 사장님 중 한 분인 '펌킨'님이 몇 개월 전 나에게 물어보신 질문. 작년의 첫 방문을 시작으로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되면서 다양한 주제로 얘기를 하지만 나는 미식을 사랑하는 '콤마'인지라 내가 주로 떠드는 주제는 역시나 음식과 미식에 대한 얘기다. 나는 잠시 생각을 했지만, 역시나


"네, 없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없어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드릴 '평진냉면'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강릉 남항진에 상당히 좋은 평을 받는 평양냉면을 선보이는 가게가 있다는 것을 주변의 나이가 어느 정도 있으신 지인들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 남항진에 평양냉면을 괜찮게 한다는 곳이 있다고 하던데?"


"남항진에요?"


강릉에서 남항진이라고 하면 공군부대가 있는 곳이며, 병산동 감자적, 옹심이 거리가 있고, 바닷가 근처에 전문 예식장이 자리 잡은 '평양냉면'이 거기서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곳이다. 거기다가 영동권에서 막국수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삼교리막국수의 강릉 본점이 남항진 해변가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평양냉면을 잘하는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미가 끌렸다. 초록색 지도어플을 꺼내서 바로 검색에 들어간다, 정보프로그램에서는 이미 많이 다녀갔고, 방문자들의 호의적인 후기가 잔뜩 달려있었다.


'평진냉면'의 뜻은 '평양 진짜 냉면'이라는 뜻이라고 주인장이 이름을 지었다고 하니 회냉면을 필두로 한 함흥식의 냉면이면 모를까 평양식의 냉면 맛을 제대로 선보인다고 하니 주변에 있는 수도권 출신 지인분들에게 증거를 제대로 해드리기 위해서라도 꼭 방문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가을의 초입을 지나 한 달에 한번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피자집 샌마르의 피자대장님과 함께, 나는 남항진의 평진냉면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지 않으면 왕래가 그리 편하지는 않은 장소에 평진냉면은 자리를 잡고 있다, 미국 가정식을 선보이는 '리틀다이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평진냉면'이 보였다. 평진냉면 입구에 가면 보이는 재미있는 안내문이 하나 있는데 꼭 읽고 들어가시길 바란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우리 평진냉면은 제가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맛이 좋지만 줄 서서 2시간 이상 기다릴 정도로 맛있는 냉면이라고는 얘기 못하겠습니다, 취향에 맞으시는 분은 국물도 안 남기시고 싹 비우거나 싱겁다며 맛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호불호가 강한 냉면입니다. 그리고 저는 정말로 냉면밖에 할 줄 모릅니다, 막국수는 죽어도 할 줄 모릅니다'


평진냉면이 냉면으로 이름을 얻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줄까지 서는 지경이 되고, 영동지역에서 냉면을 하면서 왜 막국수는 할 줄 모르냐는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듣고 사장님께서 내건 안내문이 가게 앞에 걸려있으니 그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십분 공감할 수 있다. 거기다가 마음 같아서는 매일 점심, 저녁으로 영업하고 싶지만 육체적으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힘이 들어 수요일은 휴무요, 영업은 수요일을 제외한 점심에만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평양냉면 특성상 포장, 배달은 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못 박아서 공지를 해놓았다.


가게에 들어서면 밝은 빛 아래에 밝은 나무와 한지로 발려진 벽 인테리어와 가구들, 통유리로 된 바깥쪽의 큰 창문,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종합 뉴스를 발표하고 있는 커다란 텔레비전. 피자대장님과 내가 방문을 한 시간은 평일 오전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식사하는 시간만 해도 최소 7,8팀이 오가며 꽤나 바쁜 모습을 보였다.


"여기가 평양냉면도 맛있지만 비빔냉면도 맛이 좋아서 면을 먹고 나서 남은 양념에 밥을 비벼 먹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평진냉면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피자대장님과 평진냉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 육전도 팔고 있네요?"


"네, 육전도 평이 좋았는데요, 식사 전에 커다란 완자를 하나 준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꽤 별미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면 콤마님은 뭐 드실 거예요?"


피자대장님이 나와 메뉴판을 둘러보며 얘기를 하던 중 결국 결론을 꺼냈다, 나는 당연히


"평양냉면 먹어야죠, 평양냉면 맛보러 왔는걸요."


그러자 피자대장님도 웃으시면서,


"저도 평양냉면입니다."


"역시나 그렇죠? 진짜 평양냉면 맛이 나는지 먹어봐야죠."


평진냉면의 메뉴판을 보면서 나는 궁금한 마음에 비빔냉면을 시켜볼까 하는 잠깐의 생각도 있었지만 평양냉면의 육수맛이 서울에서 먹어봤던 평양냉면의 맛에 버금가는 것인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에 변치 않은 마음을 붙잡고 안전하게 평양냉면 주문에 성공했다.


"콤마님은 평양냉면 어디서 드셔보셨어요?"


"저는 서울에서 잠시 근무할 때 필동면옥을 먹어봤었는데요, 처음 먹었지만 마음에 들었어요."


"어떤 맛이었는데요?"


"음... 처음에는 맹숭맹숭 싱거우니, 고기가 있는지도 모르겠는 맛이 나는데요 육수를 마시면 마실 수록 계속 고기 육수의 맛이 입안에 겹겹이 쌓여서 엄청나게 고소하고 진한 맛으로 마무리를 하게 되죠. 평양냉면을 괜히 세숫대야와도 같은 커다란 스테인리스 사발에 주는 게 아니더군요."


피자대장님과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서울의 냉면집들이나 최근의 식도락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니 면을 먹기 전에 전채요리처럼 손님들에게 주어지는 고기완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른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완자인데 돼지고기를 가루처럼 곱게 갈고 양파와 파를 다져 넣어서 평평하게 편 후 달걀물을 입혀서 부쳐낸 완자였다.


평진냉면에서 냉면을 주문하면 식전에 제공하는 완자


"이게 손님들에게 그렇게 좋은 평을 받는 완자인데요, 기대되네요."


"사이좋게 반 갈라서 먹어봅시다."


젓가락으로 찢어서 입안으로 넣으니 돼지고기였는지도 모를 만큼 혀 위에서 달콤하고 끈적한 식감의 고기와도 같은 크림과도 같은 것이 녹아내리면서 중간중간에 박혀있던 대파와 양파가 부드럽게 씹힌다. 돼지고기는 씹히는 식감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갈아내었고, 달착지근하게 간을 해서 그런지 돼지고기로 빵 위에 발라먹는 잼을 만든 것과도 같은 식감이었다. 겉면은 달걀물이 구워져서 바삭한 식감에 이유식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부드러운 고기와 대파의 식감이 입안에 고소하고 달콤한 맛으로 들어오니 평양냉면을 먹기 전에 배고픔을 증폭시켜 마음을 더 안달 나게 만든다.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완자라고 안 했으면 고기로 만든 지도 모를 만큼 부드럽네요."


"그런데 이거 살짝 달달한 맛도 있어요."


"익은 색이 옅은 분홍색이니까 돼지고기인 것은 확실한데, 맛이나 식감은 돼지고기인 줄도 모르겠는걸요."


그렇게 평진냉면에서 무료로 주어지는 완자에 대해서 서로 신나서 말이 많아지고 있던 차에 우리를 기쁨의 침묵으로 이끌어 줄 평양냉면이 등장한다. 서울에 있는 평양냉면 집에 가면 있는 커다란 세숫대야와도 같은 스테인리스 그릇에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평양냉면의 국수의 양보다 2배는 더 주시는 평진냉면의 거대한 평양냉면. 육수는 기대한 대로 속까지 다 비춰 보이는 맑고 투명한 색, 그 위에 무리 지어 둥근 원반을 띄우는 약간의 기름방울과 헤엄치는 살얼음들.


"사리가 엄청 큰데요."


"이렇게 양이 많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다 먹으면 되겠죠."


평진냉면의 평양냉면


나는 제일 궁금했던 육수의 맛을 확인하기 위하여 냉면 사발을 번쩍 들어서 입으로 가져간다. 과연, 진짜 평양냉면의 맛일까? 물론 요즘 먹는 평양냉면은 조미료도 아끼지 않고 넣고 새콤달콤하게 맛을 내서 먹기 때문에 진짜 평양냉면의 맛을 아는 사람은 평양에서 살다가 오신 어르신들 밖에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내가 비교할 대상은, 필동면옥에서 먹었던 그 냉면 육수가 되는 것이다.


후루루룩


싱겁고 물과 같은 맛이다, 하지만 그 끝맛에 묘한 고소함과 은근한 고기의 맛이 느껴진다, 혀의 뒤끝, 혀뿌리와 양옆에서 느껴지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묘한 기름진 고기맛. 이거다, 나는 이 맛을 기대했었다.


"아, 싱거운 물과 같은 육수이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맑고 고소한 고기맛. 대장님, 두고 보세요, 지금은 싱겁다고 할지라도 계속 드셔보시면 진하고 고소한 고기맛으로 끝날 겁니다."


"정말 그렇네요, 맑은 고기맛이 나는 것 같아요."


면발을 들어서 잠시 본다, 껍질을 많이 벗겨내어서 밝은 회색 혹은 흰색이 나는 면발이다. 중간중간에 보이는 검은 점들은 메밀껍질을 조금 섞어 넣었다는 증거, 면발을 젓가락에 잔뜩 휘감아 입으로 가져간다.


후루루루룩


입으로 살짝살짝 씹을 때마다 풋풋한 메밀냄새와 매끈한 메밀 알갱이로 만든 국수의 투박한 식감, 하지만 만만치 않은 국수라는 것을 보이듯 입안에서 툭툭 끊기는 메밀국수. 심심하게 맛을 천천히 쌓아 올라가는 냉면육수와 함께 발을 맞춰 자신의 맛과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구수한 풍미만을 내뿜으면서 평양냉면 그대로의 맛을 한 발자국씩 쌓아가는 국수. 나는 그 균형에 감탄하며 국수를 씹어 넘기고는 냉면사발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높이 들어 다시 마신다.


후루루루루룩


"캬아, 평양냉면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맛이군요."


"그러게요, 천천히 맛이 들어간다는 말이 이해가 갑니다."


순메밀로 만든 면발에 메밀껍질이 조금씩 묻어있다



원조 평양냉면을 먹어본 적도 없고, 서울에 있는 면옥들을 많이 가본 적도 없는 강원도 거주민들이 평양냉면의 맛에 대해서 논한다는 사실이 거의 농담에 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평양냉면이라는 음식을 즐기고 있음은 분명했다.


후루루루루룩


피자대장님과 나는 다시, 거의 비슷한 순간에 냉면 사발을 들고서 냉면 육수를 마셨다. 평진냉면에서 물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물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원한 냉면 육수를 물처럼 마시면 그만이지 않은가. 심심한 냉면 육수이기 때문에 마시면 마실 수록 고소하고 진한 고기 육수의 맛이 계속 입안에 쌓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기분이던 냉면의 육수는 이제 내 입안과 혀 전체에서 고소한 고기맛을 강하게 뿜으며, 내 입술에서도 끈적하고 기름진 고기의 맛이 나는 기분이었다.


후루루루루룩


동치미 국물처럼 맑은 평진냉면의 고기육수


평진냉면을 비롯한 거의 모든, 훌륭한 면옥의 평양냉면이 그렇겠지만, 평양냉면의 육수라는 것은 참 신기한 맛이다. 아무렇지 않은 맛을 내는 것 같은 육수이지만 육수를 뽑아내는 주방장의 혼신의 기술과 지식이 맑은 육수 안에 녹아들어 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는다, 자랑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 맛을 볼 때에도 자신이 얼마나 공을 들여서 만들어진 육수인지 입도 뻥끗하지 않는 육수이지만, 시간을 들여서 계속 마시다 보면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다. 원래 이런 맛의 육수였는데, 내가 민감하지 못했나 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한 번을 먹어도 잊을 수 없는 진득하고 여운이 긴 고소함과 기름진 고기맛.


'무색무취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맛이랄까. 결국에는 자신의 색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겠지, 꾸준한 사람은 말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냉면보다는 쫄깃하고 매콤 달콤한 함흥냉면이나, 달콤하며 감칠맛이 넘치는 밀면, 시원한 막국수 등등 자신의 끼와 색을 더 쉽게 드러내고 발산하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평양냉면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는다, 일반적인 꾸준함과 공을 들여 쌓아 온 시간과 인생도 결국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풍미를 꽃피울 테니까.


"평진냉면, 가게 사장님의 자부심만큼이나 훌륭한 평양냉면이네요."


"확실히, 인정합니다."


그렇게, 각자 평진냉면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피자대장님과 나는 카페정화로 평일 오후의 나른한 커피 한잔을 위해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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