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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Oct 07. 2023

[미식일기] 유포리막국수, 춘천

메밀의 향에 취한 행복감, 동치미와 수육은 덤.

한민족 최대의 명절 중 하나인 설.... 이 아닌 추석이 몇 주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쁜 여자의 고향은 춘천이고, 우리가 가야 할 '시댁'이라는 곳은 부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댁과 처가를 나눠서 방문하는 나와 이쁜 여자만의 연례행사와 같은 전통이 있다. 전통이라고 해도 결혼하고나서부터 생긴 것이긴 하지만. 추석을 쇠기 위하여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강릉에서 춘천을 갔다가 부산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지 대략적으로 한반도의 지리를 머릿속에 담고 계신 분들은 이해를 하시리라 보기 때문에 우리는 처가를 먼저 추석 전 주에 들리고 추석 때에 시댁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점심에 뭘 먹을까? 저녁에는 호박만두 해주신다는데."


"음... 후평왕족발을 가도 좋지만, 그래도 지난번에 장인어른께서 말씀해 주셨던 춘천의 영서식 막국수를 하는 곳 중에 한 곳을 가면 좋겠는데."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쁜 여자와 필자 간의 상호존중적이고 평화로운 협의를 통하여 도출된 대략적인 결론으로 우리는 몇 달 만에 도착한 처가댁에서 애호박과 두부로 가득한 심심하고 담백하며 달콤하기도 한 만두로 저녁을 먹던 도중 결국 쉬운 타결을 이끌어내었다.


"아빠, 내일 저녁에는 막국수 먹으러 가자."


"그래, 내일은 오빠네도 같이 먹으니 거기로 오라고 해야겠구나."


"매제도 오는군요. 오래간만에 얼굴을 보겠네요."


마지막으로 춘천을 방문했을 때, 장인어른께서는 춘천의 대표적인 전통적인 영서식 막국수집을 몇 군데 얘기해 주셨었는데, 나는 춘천에 올 때마다 그곳들을 한 번씩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있었다. 막국수가 영동이든 영서든, 다른 지방에서 하든 막국수는 막국수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영동에서 먹는 방식과 영서에서 먹는 방식은 많이 다르다. 사실, 옛날에는 막국수는 '물'과 '비빔'이란 것도 없었고 갓 뽑아져내려 온 막국수까지는 어디나 같겠지만, 어떤 지방에서는 양념장을 올리면 각자 알아서 육수나 동치미를 부어서 먹는 식이거나 무조건 동치미를 말아서 먹는 식이었을테니까. 애초에 '물'이나 '비빔'이라는 선택지는 없이 각자 환경에 맞춰서 먹는 것이 각자만의 막국수였지만 세상이 좋아지고, 식재료의 폭도 넓어지고 이런저런 기호를 맞춰서 먹다 보니 '물'이냐 '비빔'을 따질 수 있는 맛있고 즐거운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추석이 되기 전 주의 토요일, 나와 처가식구들은 유포리에 있는 유포리막국수에서 점심 만찬을 즐기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유포리는, 춘천에 사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춘천시내에서는 차로 수십 분을 가야 있는 산골짜기에 있는 신북읍에 있는 지역이다. 춘천의 북한강과 소양강을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 소양강을 건너서 마적산 아래 농업기술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포리, 그 속에 유포리막국수가 있다. 춘천에서는 외곽지역에 속하는 마을이지만,


"주말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있네요."


"응, 여기 춘천에서는 유명하고 방송에도 몇 번 나온 곳이야."


춘천의 토박이이신 장인어른께서 나의 놀라움을 거들어주신다. 실제로 살짝 낡은 것 같은 '유포리막국수'라고 쓰인 간판 앞에 비포장의 매우 넓은 주차장이 있는데 막국수를 먹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과 그들이 타고 온 차로 가득하고 식당 앞에서는 손님들과 그 아이들이 뛰놀거나 한쪽에서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로 식당이 붐볐다.


'바다와 논밭, 호수만 없지 강릉의 유명 식당의 모습과 같군.'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각종 방송에 나온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는 사진과 방송프로그램들의 명패등이 자랑스럽게 벽에 걸려있고 널찍하고 길게 깔려있는 식탁과 수많은 의자들, 거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칸막이를 끼고서 일행별로 앉아서 식사를 하는 손님들이 방송사진과 명패들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먼저 와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던 매제 내외가 우리를 반긴다, 하얀 식탁보가 깔려있는 식탁 위에는 각자를 위한 막국수 한 그릇들과 탁자 끝에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야의 투박한 대리석처럼 썰린 무가 비단잉어들처럼 담겨있는 맑은 동치미, 식탁 가운데에는 수육과 감자전, 손두부까지. 굉장히 토속적인 상차림이라 더 반갑다.


"여기 면수 좀 주세요."


"네에-!"


영동의 막국수 집에서는 육수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지만 영서 쪽으로 오면 면수를 달라고 하는 손님들이 많다. 오장동 함흥냉면 집에 들어가서 식전에 면수를 마시듯이 말이다.


이미 한차례 시음이 끝난 후의 면수, 뿌연 액체의 색감은 얼마나 구수한 맛을 담고 있는 면수인지 증명한다


"자자, 식전에 이렇게 면수를 각자 취향에 맞춰서 마시는 거지. 면수를 컵에 따르고... 여기 간장을 조금 넣어봐."


"아, 여기까지는 아내가 저에게 알려준 것이군요."


컵에 면수를 따르니 걸쭉한 숭늉처럼 보이는 메밀면수가 꿀렁이며 흘러나온다. 거기에 짜지 않게 간장을 조금만 타서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서 한 모금.


"오... 흐릿한 면수의 색만큼이나 걸쭉하고 구수한 면수네요. 간장을 넣으니 입에 더 맛있고요."


"그게 입에 맞으면, 여기 양념장을 조금 타서 먹어봐."


영서식 막국수를 설명서로 읽으면서 먹듯이 장인어른께서 내가 영서 막국수를 배우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시면서 알려주신다. 나도 장인어른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막국수 양념장을 조금 젓가락으로 집어서 간장이 들어간 면수에 살짝 털어 넣는다. 그리고 다시 휘적휘적 젓는 젓가락. 촘촘하게 썰린 대파와 마늘이 면수 위로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마시면서 씹는다.


"구수한 면수의 맛과 함께 파와 마늘의 향기, 간장의 짭짤함과 어우러져서 맛이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만약 그게 괜찮으면 이것도 시도해 보게, 나는 식초도 조금 더 넣어서 먹는다네."


"으, 아빠, 그건 내 취향 아니야."


옆에서 이쁜 여자가 그녀의 아버지이지, 나의 장인어른 되시는 분의 취향에 대한 반발심을 나타내지만 나는 어른을 따라서 식초를 조금 넣어서 마신다. 짭짤함과 매콤함에 약간의 신맛, 구수한 향기가 이전보다는 사라지는 느낌이라 나도 식초를 넣어서 마시는 면수까지는 쉽지 않다. 애초에 나의 취향은 면수만 구수하고 따뜻하게 마시는 것이라 춘천 토박이 어른을 따라 하는 면수 취향 모험은 거기까지 하기로 했다. 영동 쪽에서는 순 메밀로 면을 뽑는 곳에나 가야 면수를 마실 수 있는 편인데, 영서 쪽에서는 이렇게 메밀면수를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 것도 영동과 영서 막국수의 차이 중 하나이겠지.


"동치미 육수의 맛을 먼저 볼까."


나는 종이컵을 하나 들어서 동치미 국물을 국자로 한 모금 퍼서 담아본다. 상큼한 향기가 올라오는 기분,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은 맑은 동치미다. 천천히 목 넘김을 느끼면서 마셔본다. 굉장히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이 입안의 깊은 곳으로부터 느껴진다, 동치미 특유의 달콤함이 나면서 발효된 산미와 새콤함이 살짝, 기분이 맑아지는 맛이다. 그렇다, 훌륭한 동치미막국수 집에서 선보이는 동치미 국물들이 그러하듯이 어두침침하거나 우울한 기분도 맑고 푸른 하늘처럼 동치미의 시원함과 상쾌함으로 확 날려버리는, 나의 하늘이 맑아지는 맛이다. 맛 좋은 동치미들은 고유의 맛을 각자 갖고 있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상쾌함과 시원함으로 맑은 하늘을 마음속에 그린다는 것이다.


"진정 막국수에 말아먹는 동치미의 맛이네요. 상쾌합니다."


나는 그제야 내 앞의 막국수 그릇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막국수 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의 그릇에도 막국수가 산처럼 쌓여있는 것으로 봐서는, 모두가 곱빼기를 시켰거나 보통을 시켰거나, 둘 중 하나이겠지?


"유포리막국수는 보통 막국수가 이래."


"보통 시켰는데, 다 곱빼기처럼 나오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 좀 적게 먹고 올 걸."


실제로 보실 막국수의 양은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먼 옛날 밥 대신에 막국수를 밥처럼 푸짐하게 먹던 것을 반영한 막국수의 양인지는 몰라도 사진으로는 표현되지 않게 쌓아 올려진 막국수가 유포리막국수의 '보통'이다. 보통이 이렇다면 곱빼기는 대체 얼마나 많이 막국수를 쌓아 올린다는 것인가. 유포리막국수의 보통 막국수의 양에 놀라며 우걱우걱 막국수를 흡입하는 필자, 툭툭 떨어지는 무심한 식감에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퍼지는 구수한 메밀의 향. 그 동치미에 그 메밀국수다, 구수하고 심심한 메밀밭이 동치미가 그린 푸른 하늘 아래에 펼쳐진다. 턱의 저작운동을 조금 더 강하게, 열심히 해서 막국수를 삼키고 있는 모습을 장인어른이 보시며 웃으신다.


"여기 유포리막국수의 사장이 알아듣는 '원장'이라는 말이 있어."


"'원장'이요? 무슨 뜻인가요?"


당신이 좋아하시는 막국수 집을 맛의 메모까지 해가면서 잘 먹는 사위가 흐뭇하셨는지 지역 주민만이 알 수 있을 법한 얘기를 풀어놓으신다.


"여기 옆에 농업기술원의 원장이 여기 단골인데, 양이 너무 많다고 해서 보통의 반만 달라고 했어. 그 원장은 여기 올 때마다 보통의 반만 먹은 거지. 그때부터 보통 말고 '원장'이라는 크기가 있는데, 반만 달라는 뜻이야. 여기 오래 있었던 직원이나 사장만 알아듣는 말이지."


"아하, 반만 먹고 싶으면 '원장' 달라고 하면 되는 거군요, 하하하.."


"그리고 이거 수육 식기 전에 얼른 먹어. 여기 수육은 말이지..."


장인어른께서는 식탁에 놓여있던 설탕, 양념장, 식초, 겨자 중에서 노란색 통에 담긴 겨자를 잡고서 수육에 함께 나온 새우젓에 뿌리고 섞으신다. 겨자와 새우젓을 섞어서 수육을....? 살다 보니 처음 보는 소스의 조합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필자.


"와, 수육을 겨자랑 새우젓에 찍어먹어요?"


"그럼~ 먹어보게."


수육의 살코기와 비계 부분이 영롱하고 기름지게 반짝거려서 먹어보지 않고도 이미 맛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겨자에 새우젓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다. 그래도 보기보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의심치 않고 찍어먹는다.


비계 부분이 반짝거리며 빛난다



쫄깃하고 찰랑거리는 비계와 부드럽고 잡내 없는 깔끔한 맛의 수육, 거기에 겨자와 새우젓, 짭짤하면서 알싸하게 코를 휘감는 냄새이지만 겨자의 매운맛과 새우젓의 소금기가 오히려 감칠맛과 침샘을 자극한다. 그리고 다시 입안에 남아있는 고소한 돼지고기 수육의 기름맛, 다시 겨자와 새우젓을 수육에 묻혀 씹으면 깔끔하고 고소한 수육의 맛만 입안에 남아서 계속 입을 다신다.


거기에다가 먹는 흐름을 놓치지 않고 나는 막국수를 동치미와 함께 흡입한다. 막국수를 입안에 말아 넣을 때마다 코로 올라오는 구수한 메밀의 향기가 심심하고 순하지만 인상적이다. 메밀의 향과 식감을 좋아하는 나에게, 유포리막국수는 좋은 인상을 주는 음식을 한다. 맛이 좋았고 배도 고프다 보니 그릇 안에 쌓여있던 메밀면은 이미 바닥이 나버린 동치미 육수만큼이나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의심하지 말고 일단 새우젓과 겨자를 섞어라, 맛이 좋다


"다 먹었으면, 여기에다가 면수를 부어서 간을 해서 먹는 거지."


다 먹은 막국수 사발에 면수를 다시 부어서 드시는 장인어른, 하지만 나의 막국수 사발에는 동치미 면수가 많이 남았다.


"앗, 그러면 얼른 동치미를 마셔야겠군요. 물막국수 좋아하는 사람들은 면수로 마무리하기는 어렵겠어요, 물로 배가 불러서, 하하."


"면수로 막국수를 마무리하려면 동치미를 자작하게 부어서 비빔으로 먹는 게 더 편하지."


나는 급하게 동치미 국물이 조금 남은 사발을 후루룩 들이키면서 면수를 받아서 남은 양념장의 다진 마늘과 파를 면수에 섞어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다, 작은 조각으로 남아있던 메밀면도 이참에 다 입으로 몰아넣는다. 이것도 그릇을 다 긁고 닦아 먹는 것이니 한국식 스카르페타라고 불러도 되려나, 아니면 조상님들이 식후에 숭늉 드시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해야 되나, 어느 쪽이든 맛있으면 그만이겠지.


이번에는 유포리막국수를 먹었으니, 다음번에 춘천을 방문하면 어떤 곳의 막국수를 먹을 수 있으려나. 앞으로의 춘천 처가 방문이 더욱 즐거워질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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