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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Dec 23. 2024

[미식일기] 정든추어탕, 강릉

꾹저구집으로 시작해 추어탕집이 되었지만 손님들이 두부조림만 주문한다.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현재 살고 있는 월셋집에 그리 불만이 없다. 초등학교가 바로 앞이라 동네도 조용하고 안전하며, 자가용 자동차가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시내, 시외 교통이 잘 연결되어 있고, 강릉의 주요 상권들에 도보나 시내버스로 편하게 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집이라 이사 갈 생각이 거의 없었다.


다만, 김고로와 이쁜 그녀도 결혼을 한지 조금 연차가 되어 몇 년이 더 지나면 법적으로는 '신혼'이라는 딱지를 떼어야 하는 시기가 오기에 그 이전에는 그 이점을 활용하여 어디론가 이사를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왠지 모를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있는 때였다.


그러한 김고로와 이쁜 그녀의 마음을 하늘에 계신 조물주께서 굽어살피사, 주변에 갑작스럽게 당근이라는 디지털 채소를 통하여 매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연히 이쁜 그녀가 발견한, 현재 집 근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래된 아파트를 발견할 수 있었고, 좋은 가격으로 직거래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남서향의 따뜻한 햇살이 서서히 하루를 비쳐오기 시작하고 행복하고 화목한 삶을 살았던 한 가족이, 이제는 자녀들을 독립시키고 강릉의 외곽으로 집을 지어서 이사를 가는, 따뜻한 복을 남기고 가는 보금자리.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훈훈한 기운과 활발한 기운이 살아있는 그 집이 마음에 들어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집을 1주일 만에 사버렸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나도 지금까지 어안이 벙벙하지만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것.


그렇게 아파트 매매 계약을 체결하는 날,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집주인 부부분들을 경포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만나 서류를 준비하고 근처에 있는 어느 친절한 법무사님의 사무소에서 아파트 매매 계약을 맺었다. 김고로와 이쁜 그녀가 집을 두어 번 정도 보러 가면서 챙겨간 사과와 예의, 집에 대한 찬사가 집주인분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법무사 비용도 내주신 호의에 이어서,


"주차는 어디에 했어요?"


"저희는 차가 없어서 버스 타고 왔습니다, 선생님. 하하."


잠시 물음표가 떠오르시던 집주인 부부분들의 얼굴에 무언가 미소가 번지며


"그러면 여기 식당에서 점심이나 같이 먹고 갑시다, 내가 집까지 태워줄게요."


"아, 아닛! 감사합니다!"


이제는 자녀들이 2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지긋하신 부부분들은, 김고로와 이쁜 그녀를 보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 악물고 열심히 사시던 당신들의 신혼이 생각나셨는지는 몰라도, 김고로와 이쁜 그녀에게 넘치는 호의를 베풀어주셨다. 집을 거래하면서 잠깐 이야기를 하는 정도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사실 반반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법무사 수고비를 해결해 주신 것도 감사한데, 점심까지 사주시다니. 이런 일이 당연한 일인가? 아니면 원래 이 정도까지 해주시는 일이 많은가? 아리송하고 기쁜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경포동 행정복지센터 근처에 있는 맛집으로 집주인 부부분들을 따랐다. 경포동의 그 친절한 법무사님의 사무실 근처에 '정든추어탕'이라는 한식당, 친하게 지내는 어느 형님이 이 집의 두부조림이 그렇게 맛있다는 얘기를 하셨었는데 실제로 가보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는 김고로.


"저는 여기 옛날부터 왔었어요, 여기가 원래는 꾹저구집이었는데 꾹저구가 많이 잡히지 않게 되면서 추어탕집이 된 거거든요."


"그러셨군요, 선생님. 저는 여기 두부조림이 그렇게 맛있다고만 얘기를 들었었어요."


"그래요? 맞아, 여기 두부조림이 맛있어요. 오늘도 두부조림 먹을 거예요."


김고로와 같은 식도락가에게 소문의 맛집을 실제로 확인하는 순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다. 사진으로만 소개받은 소개팅이나 맞선 상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과 비슷하다. 기대했던 대로 맛이 좋다면 식사를 하며 음식을 즐기는 기쁨이 두 배이고, 기대보다 좋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지'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가능한 식사를 즐겨본다, 말이 많지 않은 식사가 되겠지만 말이다.


"몇 분이세요?"


"4명입니다, 오래간만에 뵙네요."


"네~! 여기 앉으셔요. 두부조림이시죠?"


"네, 두부조림 4인분 주세요."


집주인 부부의 남편 되시는 분께서 주문을 마무리지으시자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예의 바르게 수저와 물컵을 정리한다. 아암, 많은 호의를 받았는데 싹싹하게 움직이는 것이 인지상정.


"자네는 그래서 무슨 일을 하며 사나?"


"네, 저는 지금..."


집주인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김고로는 식당 안을 돌아보았다. 이제 막 낮 12시가 된 점심시간이니 일반 밥집들의 손님이 가장 몰리는 시간이다. 근처에 정부기관의 사무실들과 법원의 강릉지원청이 있는 부근이라 그런지 정부 사무실이나 공공기관의 점심시간이 땡 하고 울리자마자 다들 몰려왔는지는 몰라도 사무직으로 보이는 분들이 순식간에 식당으로 몰려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식당은 햇살이 훈훈하게 들어오는 자리에 있어 큰 창틀에 블라인드를 설치하며 햇살을 적당히 식당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나무로 된 의자들과 식탁, 식탁은 식탁보와 유리로 덮어 마치 집에서 밥을 먹는 기분이 들고, 주방 근처에 탑처럼 쌓여있는 만두의 산은 (비록 판매용은 아니었지만) 명절에 친척집에 놀러 온 분위기를 연출했다.


"근데 여기 식당 이름은 분명 '정든추어탕'인데 다들 두부조림만 먹고 있네요?"


"맞아요, 여기 두부조림이 맛있어서 나도 예전에 한번 두부조림을 먹은 이후로는 두부조림만 먹었어요."


김고로는 퍽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두부조림만 시켜 먹는 것을 주방에 있는 사장님과 일을 돕는 따님분들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꿋꿋하게 '추어탕'이라는 메뉴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계속 이어나간다는 사실. '정든추어탕'이라는 식당의 이름을 고집해도 이곳에 와서 밥을 먹는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이곳의 두부조림이 맛있음을 알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실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정든추어탕의 추어탕과 두부조림의 가격은 같다, 두부조림은 2인분 이상 주문해야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있지만.


"두부조림 드릴게요,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정든추어탕'의 두부조림 한상. 사장님의 손맛을 선보이는 백김치, 깍두기, 감자조림과 잡채도 먹지 않고는 아쉬운 손맛을 자랑한다.
백김치는 시원하고 담백하다, 감자조림은 적당히 짭짤하고 매콤한 맛의 밥도둑. 두부조림과는 다른 맛을 표현하고 있으니 맛이 겹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큼지막한 두부덩이들과 푸짐한 간 고깃 조각들이 수북하게 담겨 나오고 양파와 대파가 곁들여져서 나오는 진하고 새빨간 음식. 김고로는 두부조림의 양념 맛이 가장 궁금하기에 음식을 덜자마자 숟가락부터 푹 찍어 넣고 한입 먹는다.

"와, 양념 맛이 진하네요."


설탕의 맛과 오랫동안 졸인 양파와 대파의 뭉근한 달콤함이 간 고기에서 새어 나온 고소하고 진득한 기름맛과 함께 혀 위에 닿자마자 감칠맛과 달달함의 자극이 폭발한다, 둑에 가둬놨던 침샘이 펑하고 터지며 김고로의 눈도 번쩍 뜨인다.


"두부조림만 시키는 이유가 있네요, 감칠맛이 계속 입을 잡아끌어요."


"허허, 많이 들어요. 여기 양이 모자라지는 않으니까."


김고로와 이쁜 그녀의 표정이 활짝 퍼지면서 찬사를 연발하자 그들을 데려온 부부분들도 기분이 좋으셨는지 미소를 띠시며 계속 식사를 하신다. 부부의 남편분께서 말씀하셨듯이 4인분으로 나온 두부조림의 양은 상당했다, 두부가 식물성 단백질의 음식이라 포만감이 좋기도 하거니와 두텁게 썬 두부를 서너 층을 쌓아두셔서 밥과 함께 먹으니 위장이 금방 차오르는 느낌. 두부로 쌓아 올린 몇 층 석탑의 층수를 하나하나씩 빼먹는 기분이었다.

두부를 한 조각씩 숟가락으로 썰어 입안에 넣을 때마다 탱글탱글한 두부가 치아 사이로 매끄럽게 조각나며 머금고 있던 양념장을 뿜는다. 함께 같이 입으로 동반 입장한 고깃 조각들의 고슬고슬한 식감으로 씹히며 구수한 육즙이 양념장에 더해진다. 달콤하고 매콤한 양념장이, 잉크 한 방울로도 물 전체를 물들이듯, 혀 위에 떨어지면서 입안을 두부조림 양념장의 감칠맛으로 물들인다. 어금니 사이에서 두부가 말캉말캉 씹힐 때마다 고깃 조각의 식감과 양파와 대파의 사각거림이 어우러지며 매력을 뽐낸다.

두부의 탑 3, 4층에서 1, 2층으로 내려가며 두부를 건져먹을수록 두부 아래에서 넓게 깔려 잠자며 발견되지 않았던 고깃 조각들과 채소들, 그리고 더 진해진 양념장들이 두부와 함께 퍼골라 오며 끝까지 잘 먹는 김고로의 그릇에 안착한다.


"아이고, 우리는 이제 배가 불러서 더 못 먹으니 새신랑 많이 먹어요."


"그럼요, 제가 먹을게요.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김고로는 평소에도 두부, 순두부와 오트밀로만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두부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맛있는 두부에 더 맛있는 양념장이 더해진 두부조림은 김고로에게 거의 극락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양념의 맛이 진해지는구나. 고기도 더 많이 먹을 수 있네."


두부에 묻어있는 양념장의 농도가 짙어지고 고기의 양도 많아지면서 함께 곁들여 먹는 흰밥의 양도 늘어나지만 두부조림의 양념장 맛이 중독적으로 맛이 좋기에 오래 먹어도 지루하거나 진부하지 않다. 먹으면서도 배가 부르지 않고 계속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김고로였다.


"여기 잡채를 양념장에 비벼 먹으면 맛있어요."


"그래요?"


잡채를 양념장에 슥슥 비며 매운 잡채로 만들어드시는 어르신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 하는 김고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무조건 배워놔야 한다.

 

다진 고기가 들어간 빨간 양념에 당면이라니, 무조건 맛있는 조합 아닌가

탱글거리며 간간한 당면의 맛에 달착지근하고 매콤한 두부조림의 양념이 비벼지니 처가댁에 가면 장모님이 해주시던 고추잡채에 달달함이 더해진 맛이다. 집주인 부부분들과 함께 오지 않았다면 이런 비법은 모를뻔했어. 역시나 식당은 오래, 많이 드셔보신 경험 많은 선생님들과 같이 오는 것이 이득이라는 생각이 드는 김고로였다. 매끈한 잡채 사이로 쫄깃하게 고깃 조각들이 매콤하게 씹히니 두부조림과는 다른 방식으로 중독적인 맛이라 계속 먹게 된다.


결국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두부조림 냄비의 바닥이 국물만이 남을 때까지 싹싹 긁어먹으며 점심을 사주신 집주인분들께 감사를 표했다. 계약한 아파트의 잔금을 치르는 날을 고대하며,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집주인 부부분들의 호의를 받으며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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