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국물, 야들야들 살코기와 상큼한 막걸리의 향연. 우리 동네 국밥대장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안 먹은 지는 1년이 다 되어가는 김고로와 이쁜 그녀. 본래, 부산에 올 때면 항상 해운대의 어느 산동네에 있는 김고로의 어머니댁에서 머무는 그들이라 어머니댁 근처에 있던 큰 돼지국밥 집에서 돼지국밥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애용하던 집 근처 돼지국밥 집의 맛이 이전과는 다르게 변함에 따라서 더 이상 가지 않게 되니 돼지국밥에 대한 접근성이 많이 낮아진 탓이었다.
"나는 이번에 돼지국밥 먹고 가고 싶은데."
"음..."
김고로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전에 어머니께서 얘기해 주신, 버스 정거장 2개 정도를 가면 볼 수 있는 사람이 바글바글 몰려있는 돼지국밥 집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부산 해운대구에 있지만 그 이름은 '양산'이 들어간, 양산왕돼지국밥.
양산이라고 하면, 부산에서 광역버스로 왕래할 수 있는 이웃 도시다. 부산에 직장을 두고서 집은 양산에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부산을 위한 베드타운(Bed Town)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양산왕돼지국밥의 본점은 부산 해운대에 있고, 양산에 분점을 낸 것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 보면 여기, 양산왕돼지국밥 있는데. 여기 가자. 이전에 어머니가 여기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몰린다고 하셨거든."
"그래? 좋아, 가보자."
"그럼 내일 아침을 여기서 먹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국밥 한 그릇 먹고서 출발하자고."
김고로와 이쁜 그녀의 설날 맞이 부산 방문 2일 차 일정은, 그렇게 아침부터 돼지국밥으로 시작되었다. 양산왕돼지국밥은 아침 7시부터 영업을 하는 즉 '아침 식사됩니다' 식당이기 때문에 일찍 일정을 진행하기 원하는 김고로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월요일 아침, 오전 7시 30분, 그들은 부산 해운대구 산동네의 가파른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걸어내려 가서 경사가 완만한 산의 아래쪽, 평평한 자리에 터를 잡은 양산왕돼지국밥에 도착했다. 명절 연휴의 아직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팡이를 짚거나 자녀들의 부축을 받아서 대가족이 다 함께 식사를 하러 온 모습도 보이고 김고로와 이쁜 그녀처럼 나이 젊은 부부가 아침 식사를 하러 온 모습, 힘든 야간 근무가 끝나고서 아침을 해결하시기 위해 소주 한 병과 국밥을 홀로 즐기는 분들도 보였다. 그야말로 왁자지껄한 유명 국밥집의 일상적인 아침 풍경, 사람 냄새가 가득한 장면이었다.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밝은 황토색? 혹은 짙은 아이보리색의 나무 의자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은 돼지국밥을 먹고 있지만 대가족이 온 곳은 수육이나 순대국밥, 섞어국밥을 먹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전에 이곳에 방문했던 유명인들의 싸인도 벽에 걸려있고 국밥집을 창업한 먼 옛날 시절부터 순대를 직접 만들어왔음을 보여주는 순대를 만드는 사장님들의 모습이 커다란 사진으로 걸려있다.
"오늘은 돼지국밥을 먹지만 다음번에는 순대국밥을 먹을지도 모르겠어."
"그러게, 직접 만든 순대라면 기대되잖아."
이미 각자의 돼지국밥을 주문한 그들이었다. 수육백반도 생각을 했던 김고로였으나 그래도 가장 기본적인 국밥을 먹어보고 싶었다, 처음 방문이었으니까.
가게는 그 앞마당에 차가 6~7대 정도 주차가 가능한 널찍한 마당이 있고 그 입구를 따라서 들어오면 오른쪽에는 홀만큼 기다란 넓은 오픈식 주방이 보인다. 그 안에서는 거의 하루 내내 육수를 뿜어내기를 마친 대형 육수 솥들이 수북하게 산처럼 쌓인 돼지뼈들의 앙상한 모습을 내놓은 모습이었다.
"국밥 나왔습니다~"
한국인의 대표적인 패스트푸드답게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글부글 뚝배기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국밥이 등장한다.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재빠르게 통마늘, 부추, 새우젓에 곁들여서 나온 소면까지 와르르 국밥에 쏟아 넣고 적당히 휘적휘적 섞는다.
"크으! 돼지국밥에 소면은 무조건 맛있지!"
소면을 넣고서 국밥을 섞다 보니 국밥 안에 미리 양념장이 첨가되어 있어서 뽀얀 흰색의 국밥 국물이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어 간다.
후루루룹
진하고, 구수하며 진득한 국물 맛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 손가락과 발가락 끝까지 따뜻해지는 저릿저릿한 느낌, 입안에서 혀와 잇몸이 서로 눌어붙는듯한 기분이 드는 끈적끈적한 식감.
"와, 국물 제대로네. 돼지국밥 국물이 당연히 이래야지, 물처럼 희여멀건해서는 안돼. 끈적하고 진해야 돼."
"고소하니 좋다."
후루루룹
국밥 안에서 말려있던 소면다발이 풀어지자 젓가락으로 소면을 말아 올려 국물을 적당히 머금은 소면을 흡입하는 김고로. 식어서 굳어있던 소면다발이었지만 뜨거운 국밥의 뚝배기 안에서 다시 살아난 소면, 찰랑거리면서 입안으로 빨려 들어와 구수한 고깃국물을 철썩이며 김고로를 맞이한다.
매끄러운 밀가루면의 식감과 끈적한 국물의 질감이 만나서 씹을 때마다 구수한 국물로 입안을 적시니 본격적인 쌀밥식사를 하기 전 훌륭한 전채 요리나 다름이 없다.
"소면을 오랜만에 돼지국밥에 담가서 먹으니 훨씬 맛이 좋네."
"요새는 소면을 주는 곳을 우리가 많이 못 가봤지."
밥을 말아서 넣고 부추도 듬뿍 더 추가해서 말아 섞고는 고기와 함께 부추를 먹는다, 부드럽고 쫄깃한 돼지고기의 식감과 아삭하고 사각거리는 부추의 식감이 어우러져서 조화로운 맛을 낸다. 함께 흘러들어오는 육수의 진하고 부드러운 맛이 두 식재료를 더욱 묶어서 궁합을 좋게 변화시킨다.
우적우적
돼지고기와 부추가 함께 씹힐 때 국물과 입을 적시는 이 느낌,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하나의 가치를 좇는 아름다운 음악과도 같다.
부추를 적당히 고기와 함께 건져먹으면 국밥의 밑바닥에서 잠시 잠들어있던 쌀알들이 점차 둥실둥실,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국밥의 국물을 머금은 쌀알들은, 국물에 적신 소면가닥들만큼이나 맛이 좋다, 고깃국물에 탄수화물을 말아먹는 것은 거의 만국의 공통적인 미식 방법 아니겠는가. 고슬고슬하게 삶아져서 나온 쌀알들이 돼지고기와 부추의 식감 사이로, 부족한 달콤함과 입안을 간질거리는 식감을 채워 넣는다, 따뜻한 포만감은 덤.
"국밥 먹으니까 점점 몸이 따뜻해지네."
"그치, 뜨거운 음식은 그게 좋아. 겨울에 딱 맞아."
설날 연휴, 전국적으로 한파가 몰아쳤으나 부산과 경남, 그리고 강릉 지역을 제외하고는 폭설이 내릴 만큼 추웠다. 부산이 영상 0~2도를 유지했을 정도로 추웠으니 다른 지역은 오죽했을까. 그렇게 추운 날씨에 뜨거운 국밥을 먹으니 두세 배로 맛있는 음식이 된다.
"그런데 재밌는 공지사항이 있네?"
"음?"
그들이 먹는 식탁 위의 벽, 메뉴판과 함께 붙은 양산왕돼지 사장님들의 고향에서 가져왔다는 막걸리에 대한 공지사항.
일단 한잔은 공짜로 마시게 해 주겠다는 고향에서 가져온 막걸리, 또 한잔을 먹을 때부터 잔당 천 원이라고 하시니, 한잔을 공짜로 먹으면 사람들이 맛있어서 또 먹을 가능성이 크므로 이렇게 하셨을 거라고 김고로는 생각했다. 일종의 미끼 전략인데, 김고로는 이를 알고도 이미 미끼를 크게 물어버렸다.
"한 잔은 공짜로 주신다는 얘기, 그러면 막걸리 맛에 자신이 있으시다는 건데, 얼마나 맛있길래 이러시는 걸까."
"궁금하면 마셔보자."
"그래, 그 말이 맞지."
김고로는 부추, 깍두기 등을 직접 담아 올 수 있는 코너에 올려져 있는 양은주전자에 다가가서 종이컵에 막걸리를 반 정도만 담아서 가져온다. 맛이 어떨지는, 그래도, 먹기 전까지는 모르기에 많이 가져오지는 않았다.
꿀꺽꿀꺽
요거트와 같이 상큼하고 달착지근한 냄새가 코로 살며시 올라온다, 입안에 넣으니 약간의 탄산감이 올라오면서 우유와도 같은 부드러운 맛과 요거트의 달콤함이 섞여 목구멍으로 매끄럽게 들어간다. 술이 쭉쭉 들어간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술을 잘 못 마시는 김고로는 처음 마셔보는 끝내주는 막걸리에 감탄한다.
"와, 이 막걸리 진짜 맛있다."
"그래?"
김고로가 한, 두 모금 마신 막걸리를 이쁜 그녀가 가져가서 마셔본다.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신 이쁜 그녀의 눈도 동그랗게 떠진다.
"진짜 맛있네? 톡 쏘면서 상큼해."
"이 막걸리에 제대로 된 이름이 없는 건 아쉽네. 대체 고향 어디에서 막걸리를 가져오시길래 이런 맛이 나냐."
자신의 주량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20대 초반에 막걸리를 곧잘 마시던 김고로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양산왕돼지국밥에서 먹은 '고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만큼 맛있는 막걸리를 아직까지는 못 먹어보았다.
"더 마시고 싶은데, 아쉽구먼."
"그래, 아직 아침이고 우리는 오늘 할 일이 많아."
국밥을 먹고 있던 시각은 아직 아침 8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김고로는 그날 낮에 아버지와 함께 조상님과 돌아가신 가족분이 계신 납골당에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했기에 술을 많이 마시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었다.
"아쉽지만 이 막걸리는 여기까지만 마셔야겠군."
"그래, 나중에 또 오면 먹자."
양산왕돼지국밥에서 뜨겁고 상쾌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