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작은 '필리피노의 밥상', 묘하게 균형 잡힌 군도의 맛
"음... 재료 소진으로 조기 마감이라, 사장님 입장에서는 좋지만 손님 입장에서는... 흠... 어쩐다."
이제 입하가 지난 저녁이었지만 오후 6시가 넘어가면 아직은 빠르게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5월이다. 퇴근 후에 이쁜 그녀가 곧 집에 입양될 고양이를 보러 포남동으로 갔다기에, 김고로는 시내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서 같이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고로의 계획은 강릉 시내의 번쩍거리는 황금 아치의 패스트푸드 점과 초록색 세이렌이 유혹하는 카페 건물 뒤편으로 확장 이전을 한 우육면 집인 마이마이를 가려고 생각했으나 마이마이의 재료가 저녁까지 남아있을 거라고 예상한 김고로의 잘못이었다. 맥도널드 뒤편의 탕수육 집 옆 마이마이 근처에 가도 식당에 불이 켜져 있는 기색이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기에 혹시나 하였으나 역시나. 그리고 식당 문에 죄송하다는 문구와 함께 붙은 A4 용지의 '재료 소진 조기 마감'이라는 사장님의 메시지를 보고서는 김고로는 바로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고양이를 맡아주고 있는 그 가게가 포남동에 있으니, 포남동 먹자골목에서 끼니를 해결해야겠군.'
그는 다시 강릉의 번화가인 신영극장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 포남동으로 향하는 300-1번 버스로 환승하며 초록색 지도 어플을 검색한다. 포남동 먹자골목은 이전에는 상당히 번화했던 요식업 상권으로, 지금도 강릉의 술꾼들이 옛 강릉버스터미널이 있었던 자리인 동부시장과 함께 자주 찾는 식당가. 그래서인지 고기, 회, 조개구이, 칼국수 등 여러 요식업 업종들과 카페와 베이커리, 디저트 등 휴게음식점들이 모여서 아직 그 옛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문제는 나한테 크게 끌리는 곳이 없다...'
중국집이 괜찮은 곳 몇 개 보이지만 짜장면과 짬뽕이 끌리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칼국수나 해장국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지도상의 독특한 이름 '카에나' 그리고 필리핀 음식 전문점.
'필리핀...? 그거 궁금하군.'
대한민국에 살면서, 그것도 강릉이라는 지방 중견급 도시에 살며 필리핀의 음식을 먹어볼 일이 자주 있겠는가. 태국, 베트남, 중앙아시아 등의 음식은 각국에서 강릉으로 이주해 온 외국인 노동자 인구가 늘어나면서 시내에서도 손쉽게 맛볼 수 있는 음식이지만 필리핀의 음식은 극히 드물다. 강릉초등학교 근처에 한국분이 운영하시던 필리핀식 바비큐 집이 있었으나 안목으로 확장 이전을 했기에 김고로가 안목까지 가서 그 맛을 볼 일은 더더욱 없다.
'이왕 포남동 가는 김에 가볼까.'
마침 이쁜 그녀를 보려고 했던 가게 근처로 가니 이쁜 그녀는 그녀의 친구와 차를 타고서 잠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란다. 옳거니, 그 사이에 출출함을 채우기 위해 김고로는 '얼른 저녁 먹고 와'라는 이쁜 그녀의 말을 바로 접수하고는 방금 지도 어플에서 봐놨던 필리핀 음식 전문점 카에나로 향한다.
바닥은 까만 광택이 빛나고 좌석이 열리는 무광택의 작은 의자, 비닐막이 여러 겹 덮인 원형 테이블 위에 사진과 필리핀 영어, 한국어로 쓰인 메뉴판. 필리핀 음식은 김고로도 처음인지라 주변의 지인들이 얘기하던 필리핀식 당면으로 만든 볶음국수가 눈에 띄는 세트메뉴를 하나 주문한다. 두부와 고기가 들어간 딤섬처럼 생긴 필리핀식 군만두인 럼플랭 샹하이와 볶음국수인 판싯 칸톤, 다진 돼지머리를 볶아낸 시그시그와 밥이 같이 있는 정식이다.
주방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노부부가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흰머리가 성성하신 남편분과 어두운 갈색 톤의 피부를 가진 필리핀 아내분께서 요리를 하고 계셨다.
"여기 세트 1 하나요!"
필리핀식 토마토 미트 스파게티와 닭튀김 등이 들어간 무거운 고기와 탄수화물 식사보다는 '시그시그'라는 돼지머리 다짐 볶음이 궁금한 김고로는 일단 주문을 넣고 기다린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와서 식사를 하고 있던 어린아이 2명을 포함한 젊은 4인 가족이 생각보다 음식이 맛있다며 밝은 표정으로 음식을 먹는다.
김고로는 주문을 한 이후에도 어떠한 필리핀 음식을 더 여기서 맛볼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에 메뉴판을 다시 앞뒤로 넘기면서 음식들을 눈여겨본다. 삶은 돼지고기를 튀겨서 땅콩소스에 담가서 먹는 '카레카레'라는 음식을 보니 김고로는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레가 들어간 소스는 아니지만 카레의 밝은 황토색 빛깔 소스에 돼지고기와 청경채가 담겨있는 모양.
'흠, 이미 주문한 음식을 먹고 나서도 배가 고프면 더 먹어봐야겠군. 궁금하네.'
부엌에서 사장님들이 냉장고와 화구를 오가며 요리를 하는 시간을 잠시 기다리니 김고로의 눈앞에 주문한 음식이 나타난다.
번쩍이는 은색 포일에 쌓인 그릇 위로 불에 그을린 마늘의 냄새와 바비큐의 향, 그리고 향기로운 레몬의 향이 올라온다. 레몬이 필리핀식 볶음 국수인 판싯 칸톤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아하니 레몬을 여기에 짜서 먹는 건가 싶었다, 기름으로 볶은 국수이다 보니 느끼함을 잡아주는 것이려나? 아니면 이 레몬은 옆에 있는 돼지머리 볶음인 시그시그의 잡내를 잡아주는 용도일까? 김고로는 알 수 없었으나 레몬이 판싯 칸톤에 올라가 있으니 국수용일 거라며 자신을 갖고 레몬즙을 넓게 뿌린다. 그리고,
후룩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잡채의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당면과는 확연히 다른 식감, 오히려 중국에서 먹었던 녹두 전분으로 만든 건조하고 탄력이 거의 없는 당면과 같은 식감이다. 툭툭 끊어지면서 꼬들꼬들하게 입속에서 서로 비벼지는 맛, 쫄깃쫄깃한 식감과 튕기는 느낌과 커다란 포만감은 없지만 치아 사이에서 서로 비벼지며 짭짤하고 간간한 고소함이 입안에 퍼진다.
'신기하군, 식감이 이렇게 평범하면 굉장히 간이 셀 거라고 생각했는데 맛도 제법 괜찮네.'
짜거나 간이 세지 않다, 하지만 묘한 고소함과 간질거리는 약간의 짭짤함과 레몬의 신맛과 기름의 구수함과 어우러지면서 세 가지의 맛으로 균형을 잡아준다. 김고로는 잠시 생각에 빠진다, 이 형언하기 어려운 고소함과 은은한 짭짤함이 기름에 섞인 음식에 레몬의 상큼함이 더해졌을 뿐인데 왜 계속 젓가락이 갈 정도로 맛이 훌륭한가. 카이막을 처음 먹었을 때 맛을 어떻게 묘사할지 난감했던 이후로 처음 겪는 어려움이다.
김고로는 다시 한번 당근, 양파, 돼지고기를 한 움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욱여넣고 우걱우걱 씹어본다. 건조하고 수분감도 없다, 하지만 얇은 당면들은 기름으로 덮여 매끌매끌 입안을 기어 다니며 살아있는 듯 톡톡 씹히고 목구멍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당면들이 깔끔하게 끊어질 때, 입안의 상피세포 위로 번져가는 기름과 소금과 후추와 레몬 등 은밀한 맛들이 서로 조금이라도 더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보이지 않는 물밑 싸움, 싱겁다고 생각될 정도로 심심할듯하면서도 다시 짭짤함과 고소함이 미각을 때리니 이거 참 독특하다.
그렇다고 이 탄수화물들의 전쟁만 보고 있을 김고로가 아니다, 그 옆에서 강한 마늘의 냄새를 풍기는 시그시그를 숟가락으로 푹 퍼먹는다.
우걱우걱 쫄깃쫄깃
돼지 머리 고기를 다져서 볶은 조각들 사이로 바싹 타듯이 구워진 마늘 조각들이 숨어있다. 머리 고기를 부드러운 연골과 푹신한 지방과 살코기들이 서로 진득하게 눌어붙고 어우러져서, 씹을 때마다 그 쫄깃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거기에 코로는 마늘의 진한 향기가 그윽하다.
'이거 무조건 술안주네. 한국 사람들이 싫어할 수가 없는 메뉴야. 이거 한 숟갈 퍼먹고 시원한 맥주 한잔 갈기면, 캬...!'
쫄깃하게 고기와 지방이 씹히다가도 살짝 오독거리는 연골이 평범한 반주에 변주를 주며 다양한 식감을 만들어낸다. 평소에는 연골이나 오도독뼈 등을 정말 좋아하지 않아서 잘라내서 버리는 김고로이지만 이미 다 다져진 식재료라서 그럴 수도 없을뿐더러, 이 연골의 살짝살짝 으스러지는 식감이 함께 있는 마늘과 지방의 진한 구수함에 묻어가며 첫 입부터 김고로의 눈을 번쩍 떠지게 한다.
'내일도 평일이라서 저녁 식사에 맥주를 못 마시는 게 정말 아쉽네. 시원하게 맥주 한잔이랑 이 시그시그랑 당기면 참 좋겠는데.'
마늘을 잔뜩 사랑하는 한국인에게 큰 사랑을 받을 메뉴인 시그시그를 다 먹고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가던 김고로는 아직 자신의 배가 다 차지 않았음을 알고 땅콩 소스에 삶고 튀긴 돼지고기를 넣어 먹는 '카레카레'를 주문한다.
"사장님, 여기 카레카레 하나 추가요!"
"여보, 우리 카레카레 소스 남아있나?"
김고로의 주문에 주방의 남편분께서 아내분께 물어보니, 아내분께서 잠시 생각하시고는 고개를 끄덕이신다. 휴, 다행이다. 못 먹었으면 많이 아쉬울 음식이라고 생각한 김고로.
음식이 매우 뜨거워서 김이 펄펄 나지만, 그 수증기 사이로 땅콩의 고소함과 돼지고기의 기름진 맛이 모락모락 올라와 코를 뒤덮는다. 따끈한 냄새를 맡으니 김고로는 자신의 음식 선정에 대한 촉이 틀리지 않았음에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어디 맛부터 볼까, 일단 땅콩소스부터.'
가볍고 끈적하며 고소한 견과류의 뜨끈함이 혀와 목구멍을 타고 몸 안에 들어와 손끝, 발끝으로 뻗어나간다. 으아, 이렇게 온몸을 덥히는 땅콩 국물이라니, 새로운 맛의 세계를 경험하는 김고로.
'카레카레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국밥이나 찌개 같은 음식이 아닐까.'
하늘을 찌르는 땅콩의 고소함이 뇌를 찌르고, 한 숟가락을 더 퍼먹으니 이제는 해장국의 시원함마저 느껴지는 환각에 빠진다. 돼지국밥과 같은 진한 육수를 먹을 때 느끼는 이 진득함과 뜨거움의 쾌감을 동남아 필리핀에서도 사랑하다니, 역시 세계는 하나인가.
"크으, 이거지! 죽이네!"
김고로는 바삭하고 두툼한 삼겹살과 청경채를 숟가락에 땅콩 국물과 가득 담고 입안에 가져간다.
뜨끈한 땅콩고깃국물이 우선 입안을 촉촉하게 적시면서 살코기와 비계가 두툼하게 어금니 사이에서 사각거리면서 씹힌다, 함께 입안을 방문한 청경채도 어김없이 바삭거리면서 조각이 난다. 견과류의 고소함과 튀겨진 돼지고기의 쫄깃함과 지방의 구수함이 맞물려 김고로를 천국으로 보낸다.
'와, 이거 오늘 안 먹었으면 나중에 얼마나 후회했을까.'
빠르게 카레카레에 대한 설명을 인터넷에 찾아보니 현지에서는 바궁이라는 새우를 갈아서 발효시킨 액젓과 같은 어장을 넣어 먹는다고 한다, 마침 사장님께서도 비궁을 주셨으니 김고로도 당연히 이 바궁에 고기를 찍어서 먹어본다. 우리나라에서도 족발이나 수육에 새우젓을 찍어먹는데, 필리핀도 어찌 돼지고기가 짭짤하게 발효된 염장새우와 잘 어울림을 알았는지.
"오오..!"
국밥에 넣어먹는 다진 양념 양념처럼 새우의 감칠맛이 폭발하며 짭짤한 맛이 돼지고기의 식감과 맛을 더욱더 살려준다. 김고로는 결심했다, 필리핀 현지 사람들처럼 바궁을 카레카레의 육수에 넣어먹기로.
카레카레 육수에 바궁을 섞고 나니 깍두기 국물이나 다진 양념을 넣은 국밥의 색깔처럼 조금 더 진한 황토색으로 변하는 카레카레. 국물을 맛보니 땅콩의 고소함에 해물의 감칠맛이 김고로의 멱살을 카레카레로 잡아당긴다.바궁의 발효된 새우맛이 카레카레 돼지고기의 맛을 한층 더 살려주면서 김고로의 혀를 휘어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이건 밥을 말아먹어야 해. 필리핀식 국밥, 먹어보자고.'
마늘편이 올라가 있던 공깃밥을 카레카레의 국물이 담긴 그릇으로 밀어 넣고서 잘게 부수어서 밥을 말아먹는다. 밥과 함께 먹으니 간도 잘 맞고 입도 즐겁다. 한국에서 먹는 카레카레도 이렇게 맛이 좋은데, 필리핀 현지의 카레카레는 얼마나 맛이 좋을까.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관심이 있는 나라는 아니지만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김고로였다.
"손님, 혹시 필리핀에서 좀 살다가 오셨나요?"
카레카레 국물에 김고로가 밥을 말아서 먹자, 신기하게 보시던 사장님이 묻는다.
"아뇨, 필리핀은 한 번도 안 가봤어요. 음식도 이번이 처음이고요."
"허허, 처음에 시그시그가 들어간 정식을 주문하시고 카레카레를 주문하시길래 놀랐어요. 카레카레는 한국인 분들은 주문을 안 하시고, 필리핀 현지에서 온 분들이나 주문하시거든요."
김고로는 웃음면서 어깨를 으쓱한다.
"그런가요, 엄청 맛있는데요.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서 주문을 안 하는 거니까, 다들 한 번 먹어보면 다 이거 시킬 거예요."
식사를 마친 김고로는 기쁘게 계산을 하고 사장님께서 권하시는 믹스커피를 한잔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포남동에 자신 있게 주문해 먹을 수 있는 새로운 밥집이 또 생겼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운 김고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