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릇은 호수요, 그대 고기를 썰어보오
대한민국에 2025년의 첫눈이 왔던 날, 그날의 다음 날이었다. KTX를 타고 도착한 서울역의 승강장과 철로 주변에는 아직 다 치워지지 못한 눈들이 손에 손 잡고 여기저기 쌓여, 다음 날 찾아올 온기라는 청소부가 치울 때까지 짧은 자신들만의 천하를 누리고 있었다.
강릉에는 눈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민망한 가볍고 작은 고체 수분 결정들의 흩날림이 있었던 반면, 서울은 역시나 하늘에서도 수도 대우를 해주는지 눈에 확연히 띌 정도로 쌓이는 눈을 선사했다. 그 선물이 너무나도 신이 난 시민들 덕분에 퇴근길의 교통체증이 심화되었으려나.
김고로의 회사는 한반도의 임직원들이 모두 자택 근무인 회사라, 일 년에 단 2번 회식이 있다.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이라도 안 보면 얼굴과 목소리를 잊어버릴 수도 있기에 반기에 1회, 서울에서 회식을 진행하는데 서울에 눈이 온 다음 날이 그날이었다.
강릉에서 오는 김고로뿐만 아니라 세종이나 경기도의 조금 더 먼 지역에서 오는 인원들이 있기에 서울역 근처에서 회식을 하는데, 이번에 회사 동료분들의 안면을 인식하기로 한 곳은 '붓처스컷'이라는 미국식 스테이크 프랜차이즈의 광화문 지점.
아무리 서울을 방문하더라도 고층 빌딩과 번쩍번쩍한 내부에는 잘 들어올 일이 없는 김고로는 눈이 소복이 쌓인 대리석과 보도의 블록 위로 만국기가 휘날리는 광경, 하늘 가까이에서 번쩍이는 불빛들을 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광화문의 어느 금융센터 건물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주한 싱가포르 대사관이 있는 건물이라 그런지 1층의 안내 데스크에 양복을 차려입고 휴대형 스피커폰을 귀에 건 직원분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번씩은 쳐다보면서 임무를 다하고 있다.
김고로는 교통편 덕분에 조금 일찍 도착한 터라, 회식의 약속시간에 너무 일찍 가고 싶지는 않아서 이러한 고-오-급 건물의 푸드코트에는 어떤 식당들이 들어와 있나 궁금하기도 하기에 약속 장소인 붓처스컷이 있는 건물의 지하 푸드코트로 내려가 한, 두 바퀴 돈다. 건물 내부임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된 유럽의 어느 거리에서 볼만한 호화스러운 가로등이 내부 복도에 서 있고 한식부터 중식, 일식, 양식과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음식들에 이름난 카페 브랜드들까지 들어와 있으니 여느 백화점의 매장 부럽지 않은 곳이렸다.
이제 10분 정도가 남았으니 교양을 갖춘 신사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붓처스컷의 입구에 가서 안내를 기다린다. 미디어 매체에서만 보던 미국의 레스토랑을 생각하게 하는 인테리어에 향긋하고 푸근한 향기에, 김고로도 어느 높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적절하게 어두워 서로의 얼굴과 음식 정도는 잘 볼 수 있는 내부 조명에 반듯한 양복과 알맞은 유니폼을 장착한 직원분들, 식탁에 의자 혹은 길쭉한 소파 좌석에 놓인 테이블, 천장과 내부의 빛을 받아 반짝임을 일렁이는 거꾸로 매달린 와인잔과 술병들.
조금 카운터 앞에서 식당의 내부를 구경하며 기다리다 보니 금방 홀의 매니저 같은 분이 오셔서 응대를 해주신다, 단체 예약된 회사의 이름을 말씀드리니 안쪽에 방이 준비되어 있다며 김고로를 이끈다. 손님을 보자 큰 목소리로 친절하게 인사하는 홀과 주방의 직원들, 모두에게 환영받는 기분을 그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로님, 오셨어요? 오시는 길은 괜찮으셨어요?"
오늘 회식을 주관하시는 김고로가 일하는 회사의 인사행정 담당이신 G님께서 이미 와 계신 다른 직원분들과 담소를 나누시다 김고로를 보고 인사를 건네신다. 천장과 벽이 하얗게 테이블보와 색상을 맞춘 방에 사각형의 액자와 같은 음각과 양각이 벽에 새겨진 방, 은은한 전구색으로 밝혀진 방 안에서 타인을 보니 더 따뜻해 보이는 이유는 기분 탓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보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친절함 때문일까.
회식 메뉴 주문에 대한 안내를 잠시 들은 김고로는 스테이크 집에 온 의미를 확실히 즐기기 위해 메뉴판을 들고 전채 요리와 음료까지 모두 머릿속에 골라 놓는다. 스테이크나 음식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메뉴를 보며 취향에 맞을 만한 선택을 기쁘게 돕는다. 음식도 아는 만큼 맛있게 먹을 수 있기에 음식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이런 때 큰 도움이겠지.
김고로는 G님께서 미리 선정해 두신 전채 요리와 사이드 요리 등을 제외하고 따로 즐길 사이드와 스테이크 종류, 그리고 가니쉬를 선택한다. 구운 계절 채소에 구운 가리비, 거기에 한우 안심을 레어로 먹을 생각에 이미 침샘 댐의 저수량이 가득 차오른다. 스테이크를 더 맛나게 섭취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서 생산된 과일향이 가득한 레드 와인도 잔으로 주문. 김고로가 와인을 잘 아는 애주가는 아니지만 (그 반대다, 생맥주 한잔만으로도 익은 토마토가 돼버리는.) 컵프로필을 보고 커피를 고르듯이 와인도 설명을 쓱 읽고는 이거다 싶으면 선택하는 식이다.
음식을 주문하고는 서빙이 되기를 기다리며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나누다 보니 10명이 조금 넘는 인원들을 위한 식탁은 곧 사람으로 가득 차고, 음식들도 캣워크 위의 모델들처럼 각자 뽐내며 행진하듯 식탁 위에 나열된다.
사이드로 나온 음식들 중 김고로가 사랑한 한 접시는 피시 앤 칩스. 전통적인 통으로, 두 겹의 튀김옷을 입혀 나오는 방식은 아니지만 고급 어종을 사용하셨는지 그 속살이 솜사탕과 마시멜로처럼 푹신하고 생선의 살결이 쫄깃하게 씹히는 식감이 김고로의 손과 입을 바쁘게 만들었다. 겉은 부드러운 과자처럼 바삭했기에 식감의 대조가 훌륭. 곁들여진 바삭하고 단단하지만 담백한 카사바 칩과 일본의 깻잎이라 부르는 차조기 튀김의 독특한 허브향이 기름진 맛이 두각 될 수 있는 튀긴 생선살에 기분 좋은 변화구를 던지며 매력적인 삼진 아웃의 조화.
옆에 함께 앉으신 다른 직원분들과 나누어 먹기 위해 나온 피시 앤 칩스였지만 나중에 가보니 거의 김고로의 입맛 취향에 잘 맞는 음식이었는지 (아니면 김고로가 끝까지 잘 먹어서 그런 건지) 김고로 혼자서 대부분을 먹었다. 강릉에 있으면서 맛있는 피시 앤 칩스를 먹을 일이 거의 없기에 이렇게 맛있는 생선튀김은 더 귀한 기회다.
그렇게 앞서 나오는 전채 요리로 혀와 위장에 부릉부릉 시동을 걸다 보니 적절한 시점에 겉면이 아직도 지글지글거리는 듯한 짙은 색상의 거대한 고깃덩어리들이 등장한다. 가운데에 반듯하고 매끄러운 하얗고 둥근 접시 위에 당당히 놓인 큰 한우 안심. 곁에 살짝 그을려지듯 구워진 갖은 채소들과 앙증맞게 소고기의 곁을 지키는-짧은 시간 내에 김고로의 입안으로 사라질-가리비 삼 형제.
스테이크용으로 놓인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는 '집도'를 시작하는 김고로, 그의 눈과 머리 옆으로 즐거운 음표들이 떠다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킬 정도다.
바사삭바사삭
스테이크용 칼의 톱날면과 짙은 갈색으로 바짝 구워진 스테이크의 겉면이 서로 마찰하며 기분 좋은 연주를 시작한다. 악장이 진행되고 진행될수록 붉은 영양소가 풍부한 한우의 육즙이 꿀처럼 흘러내린다.
명화의 밑그림 스케치를 연필로 먼저 대충 하듯, 스테이크의 모양을 따라서 기다란 직사각형의 적갈색 시어링 선이 그어진 내부에서, 레어로 익은 안심이 생명력 가득한 붉음을 울컥 인다.
'굽기가 훌륭하구먼, 육즙을 놓치지 않고 잘 담아내었어.'
김고로는 몬드리안 작품 속의 붉은 직사각형을 칼과 포크를 대고 정교하게 직선으로 잘라서 한입 크기로 다시 그린 후에 붉음이었던 공간을 흰색으로 비워낸다.
서걱서걱
바사삭
우적우적
단단한 갑옷과도 같았지만 금방 부서져 내리는 설탕과자처럼, 어금니와 송곳니에 으스러지는 스테이크의 겉면이 쪼개지자 진득하고 구수한 육즙이 혀를 휘감으며 입안에 흘러들어온다.
다른 부위보다는 기름기가 많이 적은 안심이기에, 비교적 덜 부드럽고 기름진 맛은 덜 하지만, 고깃 결의 씹는 맛과 그에 따른 식감이 고깃 조각을 씹을 때마다 붉은 맛이 솟구치게 만든다. 입안에 저장되어 있던 침샘 댐이 육즙 폭우로 인해 방류되며 김고로는 결국 붓처스컷 스테이크의 맛에 침수되며 눈을 잠시 감고 그 재난을 지긋이 누려본다.
거기에 스테이크 겉면에 어느 정도의 간을 하기 위해 가미되어 있던 짭짤함과 고소한 맛이 '침강' 수원지 폭발의 촉매제가 되어 붉게 문득 김고로의 미각 세포 밭에 육수를 가득 채우고, 김고로는 다시 눈을 감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역시 레어로 주문하기를 잘했어.'
스테이크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릇에 솟아오르는 선홍색의 호수가 따뜻한 조명에 반짝임을 보며, 김고로는 스테이크 그릇을 그릇째로 싹싹 핥아먹고 싶은 깊고 원초적인 욕망으로, 충동이 끓어오름을 느낀다.
'참자, 참아. 여기서 혀로 그릇을 핥을 수는 없어. 아아, 하지만 저 육즙 아까워서 어쩌나.'
결국 김고로의 이성과 감정의 싸움은 이성의 승리로 끝났으나, 스테이크와 함께 나온 빵으로 육즙을 적셔서 먹을걸, 김고로는 이제 와서 후회하는 바이다.
바삭 바사삭
김고로는 시간이 갈수록 천천히 식는 스테이크의 온도가 아쉽기는 했지만, 이것은 시간에 따른 음식의 자연스러운 이치,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쫄깃하고 고소한 가리비의 위로도 중간중간받고, 잘 구워진 계절 채소들의 상큼하며 아삭하고 새콤, 신선한 맛이 한우 안심 스테이크 멜로디에 화음과 더 섬세한 붓터치를 곁들이며 김고로의 육식을 한층 더 다채롭고 화려하게 만든다.
'역시나 구운 토마토, 가지, 브로콜리니, 파프리카... 이 새콤달콤한 맛은 육식 위주의 식사를 더 신나게 만들지.'
만족스러운 한우 안심 시간을 마친 김고로는 동료 직원들과 함께 달콤한 디저트 나눠 먹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붓처스컷에서의 회식 겸 개인적 미식을 마무리지었다.
'아... 안심, 붉은빛, 매력적.'
두툼한 스테이크 안쪽에서 빛나던 빨간 속살이 영롱한 번쩍임이, 회식에서 만났던 동료 직원분들의 얼굴보다도, 강릉으로 돌아가는 KTX 안에서도 더 잊히지 않는 김고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