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만큼이나 오랜, 고전적 시래기추어탕, 슴슴하게 구수한.
김고로는 이쁜 그녀와 설을 맞아 부산으로 내려왔다. 한국철도공사에서 올해부터 강릉과 부산까지 이어지는 철도에 KTX-이음(서울과 강릉을 다니는 그 열차)을 놓아주며 김고로와 같은 여행객들은 쾌재를 부르게 되었다. ITX의 속도로는 거의 5시간이 걸리던 여정이 4시간으로 줄어 덜 피곤하고 시간도 아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부산에 내려온 다음날, 김고로의 아버지의 은색 자가용을 얻어 타고 조상님들께서 쉬고 계신 기장 정관의 추모공원에 들렀다가 영락공원으로 가기 전, 그들은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 반여 근처 석대라는 동네에 들렸다.
자가용으로 부산을 돌아다는 김고로가 아니기에, 석대에 올 일은 거의 없지만 한식을 주로 즐겨하시는 아버지의 추천으로 추어탕을 먹으러 간 그들. 김고로의 아버지는 '고목나무집'이라는 괜찮은 추어탕 집이 있다며 운전대를 어느 골목의 언덕으로 돌리셨다.
"여기 마이 유밍하다, 점심시간에는 인간들로 드글거려서 복잡시로"
유명한 집이라서 식사 피크 시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밥 먹기 힘들다는 말씀을 짧게 하신 아버지, 가게로 들어가는 길 중간에 있는 정말 커다랗게 꿈틀거리듯 위로 뻗은 오래된 느티나무(추정 300년 이상)를 지나서 언덕을 올라가니 어느 가정집처럼 생긴 곳에 옅은 밝은 연두색 페인트를 칠한 시멘트벽과 짙은 은회색의 알루미늄 철제문에 유리를 넣은 노포 분위기의 식당이 나온다.
"이제 여서 내리자."
가게에서 흰 장갑을 착용하신 푸근하게 인심 좋으신 어르신께서 오시더니 직접 발레 주차를 해주신다고 한다. 이런 노포와 같은 곳에서 발레 주차 서비스를 한다니, 아마도 주차를 하기가 쉽지 않고 좁아서 그런 건가 싶었다.
김고로와 이쁜 그녀 일행이 고목나무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이라 수십 명을 삼사십 명 정도의 손님들을 수용할 수 있을듯한 홀에 앉아있는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았다. 집안 건물에서 추어탕과 반찬을 준비해서 홀로 가져오는 방식인데, 이제 막 새 추어탕을 끓이기 시작해서 20분은 넘게 걸린단다. 하기사, 점심시간에 추어탕을 모두 소진했을 테니 저녁시간대가 아닌 사이 시간대에 온 손님들은 이렇게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세월의 흔적으로 도배된 바닥의 나무무늬 장판과 고동색의 나무식탁과 의자, 구석에 식기소독함에 쌓여있는 스테인리스 밥그릇과 컵들. 메뉴는 추어탕과 파전밖에 없기에, 따로 주문을 할 필요는 없다. 자리에 앉으면 인원수만큼 추어탕이 자동으로 접수.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자리에 앉아 얌전히 추어탕을 기다렸다. 그 이후로도 손님들이 계속 들어왔지만 김고로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소주나 파전을 먼저 주문해서 잡수시는 어르신분들도 있었지만 식사는 시작하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까, 드르륵거리는 서빙용 카트에 밑반찬들과 돌솥밥, 추어탕이 모락모락 김을 뿜으며 등장한다. 밑반찬은 경상도 지역에서 '섬초'라고 부르는 시금치를 비롯 고추장아찌, 가자미조림, 김치, 건새우마늘종볶음 등이 나와 훌륭한 전채 요리 역할을 한다. 밑반찬들이 제법 맛이 좋아서 입맛 돋우기 딱 좋다는 생각을 하는 김고로.
추어탕은 '시락국'이라고 부르는 옅은 된장베이스 시래기국에 남원식으로 잘게 갈려진 미꾸라지에 상큼하며 살짝 매운맛이 감도는 방아잎과 가루가 킥으로 얹어진 경상도 방식의 추어탕이다. 방아잎 특유의 향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김고로의 아버지, 방아 냄새를 맡으시고는 얼굴을 찡그리시더니,
"니네 방아잎 먹나?"
"네, 좋아요."
아들과 며느리에게 방아잎을 휙휙 집어서 추어탕 뚝배기 안에 던지신다. 돌솥밥은 잘 익은 (큰 콩이 살짝 들어간) 쌀밥을 퍼서 스테인리스 공기에 담고, 돌솥에는 숭늉을 넣어서 눌은밥을 누룽지로 우려낸다.
김고로는 추어탕의 냄새를 잠시 맡는다, 레몬그라스와 같은 산미와 된장의 구수함이 훅하고 코를 치며 올라온다. 경상도에서 생선이나 다른 해산물들이 들어간 음식을 먹을 때 자주 만날 수 있는 식재료이지만, 직접 먹어보기는 김고로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목나무집의 양념통에는 다른 지역의 추어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초가루'가 아니라 '방아잎가루'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래기가 가득한 된장 국물에는 잘게 갈린 미꾸라지가 띄엄띄엄 보인다, 김고로가 숟가락으로 크게 떠니 걸쭉한 질감이 묵직하게 올라온다.
후루룩
묵직함만큼이나 끈적한 국물이 시래기에 휘감겨 끌려 나온다, 김고로는 입을 가까이하며 한입 크게 흡입한다.
따끔한 열기와 함께, 시래기가 김고로의 목젖을 뜨끔하게 치며 부드럽게 굴러들어간다. 슴슴하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된장 육수를 몸에 감은 시래기가 김고로의 혀 위로 철퍽거리며 착지하면 된장과 시래기의 시원함과 감칠맛이 펑 터지고, 치아사이에서 잘근잘근 씹히는 추어의 고소한 맛이 고기맛처럼 올라온다. 그리고 코를 훅 치고 지나가는 방아잎의 레몬향.
'와, 이 방아잎의 시큼한 냄새가 경상도식 추어탕의 킥이구나. 누군가에게는 비릴 수도 있는 미미한 추어의 맛을 깔끔하게 정리하는군.'
고수가 쌀국수를 비롯한 동남아 음식에서 특유의 위치를 잡을 때, 경상도에서는 방아잎이 그런 위치를 잡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둘 다, 사람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도 그렇고.
김고로는 다시 고목나무집 추어탕의 국물을 시래기와 함께 흡입한다.
후루룹
자극적이지 않고 편안하며 부드러운 맛, 첫 숟가락에 눈이 번쩍 떠지는 맛은 아니지만 시래기와 된장국의 조화가 묘한 감칠맛과 구수함을 만들어내며 꼭 집밥을 먹는 착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뒤이어 따라오는 추어의 깊음과 진함. 단순한 국물음식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무서운 맛은 '아는 맛'이라고, 이 동네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집에서 먹던 '시락국'의 마법이 세대를 가리지 않고 손님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이제 후반전을 시작해 볼까.'
김고로는 반 정도 남아있는 추어탕에 남은 밥을 말고 추가로 나온 '땡초(매운 청양고추)' 다짐을 쏟아 넣는다. 방아잎가루를 더 넣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지금 이미 있는 양으로 만족스러우니 무리하지 않는다.
후룹 헙
부드러운 된장의 구수함에 입안을 얼얼하게 치는 고추의 매콤함이 코로 훅 올라온다, 이는 이내 밥과 된장의 맛에 중화되며 개운함으로 바뀐다. 그리고는 시원한 감각이 몸의 중심을 훑고 지나간다.
'후우, 평소에는 인자한 어머니가 버럭 화를 내는 맛이군.'
하지만 청양고추와 된장의 조화는 언제나 옳다, 된장과 시래기의 구수함 위에 매콤함이 혀를 얼얼하게 덥히고 사라지지 않은 방아잎의 상큼함이 코와 입을 덮으며 깔끔한 마무리.
'부드러움에서 시작되는 진함 맛, 거기에 매콤함과 깔끔한 신맛의 마무리.'
김고로는 연속으로 이어지는 맛과 향 4 연타에, 추어탕 뚝배기를 바닥밑까지 긁어먹을 기세로 빠르게 숟가락을 움직인다. 그리고 식사의 마무리는 돌솥에 끓여놓은 뽀얀 누룽지의 든든한 탄수화물, 지극히 한국적인 식사다. 그냥 맹물에 우려먹는 누룽지보다, 이미 쌀을 우려냈던 숭늉에 다시 밥을 불려서 먹으니 숭늉이 더 크림 같은 질감이다.
'크림 같은 질감에다가 구수하기까지 하니, 이는 한국형 후식이라고 인정해야지.'
김고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속도로 식사를 마치고는 이쁜 그녀의 식사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부산의 어느 한적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