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시원함이 펄떡이는 복지리, 식초의 반전은 덤
그날, 김고로의 계획은 부산역 근처 동네에 있는 '평산옥'이었다. 수육으로 미슐랭을 받은 유명한 노포이기에 김고로도 아침에 일찍 가서 맛을 보고 싶었으나 이쁜 그녀를 재촉하는 여정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아 조금 느긋하게 나갔다.
하지만 설 연휴에 대도시의 미슐랭 식당을 '느긋하게' 가면 예상대로 긴 줄을 설 각오를 해야 한다. 김고로가 미리 염두에 두었던 대로 이쁜 그녀와 김고로는 평산옥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선 관광객들의 무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김고로는 생각했다, 자신과 이쁜 그녀가 배가 고픈 와중에 이 평산옥 행렬에 참여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러다가 김고로는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 골목으로 들어오던 중에 눈여겨보았던 복국 집이 생각났다.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영업을 하는 와중에 손님들이 가득 앉아있던 곳. 이 동네의 복국 집들이 두세 개 정도가 주르륵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와중에 유일하게 오늘 열려있던 곳.
"오는 길에 복국 집 열려있던데, 거기로 갈래?"
"그래, 배고프다. 복국 괜찮지."
수도권에서는 '복매운탕'이나 '복지리' 등으로 부르지만 부산에서는 '복국' 한 단어면 정리된다. 거기에 매운 양념을 넣어 끓여 맵게 먹느냐 맑게 먹느냐의 차이. 물론 메뉴판에는 '복지리'나 '복매운탕'으로 정확하게 표기가 되어 있지만 '복국'이라고 하면 주로 복어로 맛을 낸 맑은 탕을 의미하는 듯하다. 부산에는 유명한 '초원복국', '금수복국' 등을 비롯하여 복국 집들이 많지만 중앙동에도 외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복국 집들이 있다.
옛날복국은 통유리로 된 문과 외관에 반 정도 시트지가 붙어있고 복어 그림이 붙었다. 흰 바탕에 파란색과 빨간색의 '옛날복국', 문을 열고 들어가면 유명인들이 방문했던 사인들이 붙어있고 어느 한 곳에는 복어의 종류를 나열한 그림 액자, 검은 의자와 테이블에 자잘한 자갈들이 깔린듯한 무늬의 하얀 바닥, 벽에는 동양풍의 수채화들이 걸려 흡사 일식집의 분위기가 났다.
메뉴판을 보니 참복, 까치복, 밀복 등 가격대별로 다양한 복들이 있었지만 이왕 복국을 먹으러 왔으니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참복'을 맑게 먹기로 했다. 주변에 동네 손님들을 보니 대부분 저렴한 밀복을 먹었지만 김고로와 같은 타지 사람들은 그래도 맛이 비교적 더 좋은 참복을 주문하고 있었다.
주문을 하면 그때부터 재료들을 담아서 뚝배기에 끓여내다 보니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래도 빠르게 나오는 편이었다. 밑반찬은 이쁜 그녀가 좋아하는 간장게장을 비롯해서 데친 브로콜리와 달걀말이 등이 등장하니 시장했던 이쁜 그녀는 간장게장을 집어 들어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까만 뚝배기에서 희멀건 거품을 부글거리며 내뿜는 맑은 복지리가 등장한다. 미나리와 숙주나물이 수북하게 쌓아 올려진 봉우리 틈 사이로 거뭇거뭇한 복어의 껍질과 노르스름하며 하얀 살점들이 보인다. 무언가 속을 뻥 뚫는 뜨거운 향기가 김고로의 비강 점막을 촉촉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뚝배기 위에 얼굴을 들이대니, 온천탕에 들어온 기분이군.'
김고로는 뽀얗게 김이 서리는 안경 렌즈로 인하여 시야가 흐려졌지만 숟가락을 들어 미나리와 숙주나물을 복지리 국물 가운데 가라앉히고 잠시 뒤섞는다. 그리고 국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적셨다.
후룹
처음 혀에 닿는 맛은 생선의 짭짤함과 복어 특유의 감칠맛과 시원함이 숙주, 미나리에 의해 증폭되며 김고로를 청량하고 푸른 바다로 풍덩, 집어던지는 맛. 일시에 파도의 하얀 거품이 생각났다.
"와아, 시원해."
김고로는 참지 못하고 다음 숟가락질을 이어서 다시 국물을 한 스푼. 그리고 미나리와 숙주를 집어먹는다.
아삭아삭
미나리의 독특한 향미가 코를 간지럽히고 사각한 숙주의 식감이 같이 더해지면서 복어가 가져오는 시원한 바다는 온몸으로 느끼는 시원함으로 바뀐다.
"햐, 술도 안 먹었는데 속이 풀리는 기분이다."
"육수도 진하고 맛있어, 맑은데 진해."
그러하다, 토막 난 참복이 푸짐하게 들어가 있기에 마치 육고기와 같은 진한 생선 육수의 맛이 국물에서 우러난다. 김고로는 생선보다는 육고기를 더 선호하지만 복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즐겁게 복어의 뼈와 살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뽀얀 복어의 살점이 닭가슴살처럼 떨어져 나오자, 그대로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우적우적
모양은 닭가슴살의 모양을 닮은 꼬리 쪽의 살점이지만 그 맛과 식감은 닭다리살보다 더 담백하고 쫄깃한 복어. 쫀득하면서도 탄력이 살아있는 복어의 맛은, 중국의 어느 유명한 시인마저도 고기 중에서 으뜸이라고 칭송할 만큼 훌륭하다. 김고로의 복어 경험은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는데, 그 당시에 먹었던 복어 매운탕의 시원함과 식감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이니까.
'탄탄하게 꽉 찬 살점.'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강한 치아들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는 복어'성'은 여러 갈래로 찢겨 무너진다, 그 사이에서 진한 고기의 맛이 새어 나온다. 고소하면서 깔끔한 맛이다, 눅진한 육즙이 입안으로 흘러나오며 김고로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는다.
닭고기도 참 맛있는 고기이지만, 살점의 결들이 찢길 때 느껴지는 단단하고 쫄깃한 그 복어 특유의 맛은 복어 애호가들을 생산하기 넘치게 충분하다. 거기에 마찬가지로 쫄깃하며 탱글거리고, 꺼끌 거리는 매력이 흐르는 껍질은, 김고로는 그리 선호하지는 않지만, 이쁜 그녀는 매우 사랑한다.
"나는 이 뭔가, 입안에 걸리는 느낌은 별로네. 그래도 식감은 나쁘지 않은데."
"껍질 안 좋아하면 나 줘. 난 복껍질 좋아."
먹을 수 있는 배의 빵빵한 만큼이나 김고로의 지갑사정도 그랬다면 아마 복껍질무침도 함께 주문해 줬을 텐데, 알게 모르게 미안함을 느끼는 김고로. 그래도 음식 앞에서는 궁색해지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다.
복국을 먹다 보니 무언가 흐물흐물, 미끌거리는 하얀 물질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다. 김고로가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후룹'하며 음미해 본다. 살점과는 살짝 다르게 농후한 복어의 맛과 아주 약간의 쌉쌀함, 오, '이리'라고도 부르는 '정소'가 아닐까 생각하며 잠시 검색을 해본다.
"이 흐물거리는 흰색은 뭐야?"
"내가 찾아보니까 복어의 정소라는데. 이건 나도 처음 먹어봐."
살점과 건더기들을 많이 퍼먹고는 복국이 얼마 남지 않자, 김고로는 후반전에 지금까지는 해보지 않았던 방법을 시도해본다. 이전에 어느 작가님의 복국 즐기는 방법에서도 보았고, 부산분들이 복국을 먹듯 마지막에 식초를 살짝 두른다. 복어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할 듯 맑았던 국물의 단백질들이 산에 의해 반응을 일으키며 덩어리를 지며 맑은 국물이 뿌옇게 변한다.
"저번에 초빼이님의 글에서도 봤었는데 부산에서는 이렇게 복국에 식초를 타서 많이 먹는다고 하더라."
"그래?"
김고로는 식초가 섞여 진눈깨비가 내리는 복국의 국물을 퍼서 먹어본다. 식초의 산미가 확 올라오지만 그 와중에 복국의 고소함과 달콤함마저 함께 부각하며 김고로의 눈이 확 떠진다. 누구나에게 추천할 수 있는 맛은 아니지만 이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있는지 알 수 있는 맛.
특히나 복국이 수면 아래 숨기고 있던 단맛과 고소한 맛이 폭발적으로 올라오고 끝맛이 깔끔하게 떨어진다. '이야, 이거랑 소주가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술 잘 못 마시는 김고로가 하게 될 정도다.
'당최, 이렇게 복국에다가 식초를 넣어먹는다는 발상을 누가 처음 했을까. 천재가 분명하다.'
그렇다, 세상은 넓고 음식은 많으며, '쩝쩝 박사'들은 더욱 많다. 주요 방송에서 공개적이든 혹은 SNS나 블로그 등을 통해 혜성처럼 나타나는 무명의 인물이든, 미식을 더욱 즐겁게 영위하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세간의 존경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물론 김고로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복국과 함께 공깃밥까지 깨끗하게 싹 긁어먹은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후 2시가 넘어 3시를 향해가고 있음에도, 식당은 계속 손님들로 회전하고 있다. 주변의 가게에서 혼자 늦은 점심을 드시러 오신 분들도 있고 김고로와 같은 타지의 방문객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이든 간에 옛날복국은 설 연휴에도 열며 평등하게 맛있는 복국을 제공하고 있었다.
"여기는 언제 쉬어요?"
"안 쉬어요, 설날 당일에도 오전에만 쉬고 오후에 나와예."
"아니, 왜 안 쉬어요?"
"명절 연휴에는 고향에 와서 먹으러 오시는 분들도 많아서 그분들 생각하면 못 쉽니더. 언제든지 편하게 오이소."
말씨가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오신 관광객분과 주인장과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김고로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원주의 쌍동통닭 사장님도 저런 사고를 가지셨지. 존경스럽네.'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는 중앙동의 거리를 걸었다. 분주한 사람들로 혼잡한 차이나타운 거리가 멀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