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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Jan 31. 2022

돈가스, 어릴 적 먹던

가벼운 양식의 추억

어릴 적 우리 집 근처에는 '장미빛인생'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경양식집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던 '풍년숯불갈비' 집 근처 건물의 어두침침해 보이는 지하로 터벅거리며 내려가면 한국 근대사에나 많이 나올 것 같은 쿠션과 기다란 면직 소파와 벽에는 태피스트리가 커다랗게 수놓아져 붙어있는 인테리어, 원목으로 짜인 기둥들과 바닥, 벽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있는 4인실 등 으레 경양식집이면 다 갖출만한 모든 것을 갖춘 집이었다.


1달에 1,2번 정도 나와 누나가 돈가스가 먹고 싶다고 하거나 지나가던 길에 그곳에서 스멀스멀 흘러 올라오는 브라운소스의 달착지근한 냄새가 내 코를 비집고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엄마의 손을 잡고 오늘 저녁은 돈가스를 먹으면 안 되냐며 졸라서 사 먹기도 했다.


그곳 바닥에 발을 디디면 항상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중후한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18세기 유럽 귀족의 집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나와 누나가 즐겨먹던 것은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였다. 식사류를 주문하게 되면, 우리나라 경양식의 코스는 항상 그렇지 않던가? 식전 빵과 크림/양송이/옥수수 수프 등이 미리 식기류와 함께 나온다. 식전 빵은 둥그렇고 탐스러운 모양의 노오란 모닝빵이 버터를 발라서 혹은 마아가린 조각과 함께 나왔고 수프에서는 고소한 밀가루와 부드러운 생크림 맛이 나서 집에서 끓여먹는 인스턴트 3분스프로는 왜 이 맛이 날 수가 없는지 항상 궁금해했었다.


달콤하며 감칠맛 나고 살짝 새콤하기도 했던 소스가 잔뜩 끼얹어진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가 나올 때면 어린 마음에 누군가가 뺏어먹을까 최대한 빨리 먹기도 했다. 엄마가 썰어주기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시간이 빠르게 흘러 혼자서도 두툼한 돈가스와 스테이크를 스스로 썰어먹는 때가 왔고, 그 시간의 풍파를 견디지 못한 레스토랑과 건물이 또 다른 점포로 바뀌는 것을 본 것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1980~200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동네에 번성했었던 경양식집은 일식 돈가스와 다른 외식업에 밀려 이제는 보기가 쉽지 않다. 경양식 돈가스를 하는 곳이 강릉시에서도 열 손가락에 다 들지 못할 정도이니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트렌드도 바뀌고, 그 흐름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현상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강원 고성에서 군생활을 할 때에 아주 오래된 경양식집이 하나 있었는데, 원목과 벽돌로 이루어진 인테리어와 벽에 다녀간 손님들의 낙서와 식사가 끝나면 알아서 챙겨 먹던 쿨피스와 믹스커피의 숫자만큼이나 맛도 좋고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S방송국의 백종원씨가 했었던 프로가 다녀간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매우 깔끔하고 세련된 프랜차이즈 분식집과도 같은 인테리어로 바뀌더니 더 이상 사람 냄새가 나는 경양식집은 아니게 되었다. 돈가스의 맛은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이전만큼은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 곧잘 가던 나와 나의 전우들은.


돈가스와 그에 끼얹어지는 브라운소스의 맛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는 없다, 물론 식재료, 조리기구, 조리방법 등에 발전이 있을 수는 있었겠지만 한국에서 먹는 경양식 돈가스가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 돈가스에서 기대하는 맛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옛날 돈가스의 맛과 요즘 경양식 돈가스의 맛을 비교했을 때).




그렇다면 우리와 미각세포, 혀 그리고 뇌를 속여 더 맛있는 돈가스라고 느끼고 생각하게 한 것은 식당의 분위기로 발생되는 각자가 음식에 갖고 있는 오래된 추억. 어느 누군가는 생일날 특별하게 먹었던, 누군가는 좋아하는 첫사랑과 함께 했던, 누군가는 가족들과 함께 곧잘 갔었던 그 잠시나마 행복했던 시간, 그 솜사탕과 같은 추억이 담긴 시간과 맛으로 옛 경양식집의 분위기들은 우리를 인도한다.


달큰하고 감칠맛 넘치고 촉촉한 소스가 묻은 바삭한 돈가스 한 입, 나로서는 병아리처럼 작은 입에 붉은 소스를 덕지덕지 묻히며 먹던 그 시절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마다 레스토랑과 돈가스에 얽힌 사연은 다 다르겠지만 행복과 추억의 맛은 우리의 생각보다 강력하다.


사람들이 오래된 식당을 찾는 이유는, 그리고 그 오래된 식당이 '오래된' 이유는 뛰어나게 맛이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곳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한 끼를 사서 이용할 수 있는 행복한 혹은 눈물 나는 추억 속으로의 타임머신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끼에 얼마가 되었든 잠시나마 좋았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기꺼이 잠시 다녀오겠지.



오늘도 행복한 추억,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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