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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Jan 16. 2022

고추장찌개, 할머니의

'그냥 요렇게 저렇게 잘 끼리면 된다'던 요리를 물려받은 손자의 추억

해외로 유학을 떠나기 전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전국을 버스와 기차를 타고 다니며 이래 저래 사귀어두었던 친구들을 직접 만나는 여행을 한창 하고 있었다. 서울, 서산, 당진, 천안, 창원, 마산 등등....



생전 친구들을 보러 가는 곳이 아니면 갈 일이 없는 그런 도시들을 다니다 보니, 당시 금전관리의 개념이 많이 없었던 나는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다 하고 다니다 보니 금방 편의점에서 빵을 사 먹고 찜질방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하루를 보낼 수 없는 그런 지갑을 갖게 되었다. 집에서 먹는 그런 한 끼가 점점 그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돈을 아껴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겨우 구해서 당시 머물고 있던 할머니 댁으로 내려왔을 때는 집안의 가족들은 출근하거나 다른 일이 있어 출타를 한 매우 조용했던 낮 두시.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몇 없는 손자들 중 아끼고 아끼시던 장손이 연락도 없이 집에 돌아오니 귀한 손자한테 따로 줄만한 반찬이나 찬거리가 없으셨나 보다. 하지만 모든 할머니들은 손자들을 먹일 때에 부엌에서 마법을 부리지 않으시는가,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뚝배기 하나를 내 앞에 뜨끈뜨끈한 백미 찰밥과 함께 내어오셨다. 작은 뚝배기에 붉은 찌개, 그리고 그 옆에 경상도식으로 갖은 어류를 넣어 묵힌 짠지(묵은 김치의 경상도 사투리). 시장이 반찬이라고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할머니의 정성이 열정적으로 차려진 밥을 한술 떴다.



진득한 매콤함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달큰함, 그리고 입맛을 당기는 감칠맛과 부드러운 고기와 애호박, 양파의 조화. 한식으로 끓인 모든 찌개는 거의 다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맛을 본 찌개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고추장찌개였다.



고추장이 시작된 전라도 순창에서 유래된 고추장찌개를 전라도가 아닌 경상도 부산에서 처음 맛본 나. 물론 그러한 사실에 의한 감동이 아니라, 너무나 오랜만에 아름다운 여성의 손으로 차려진 집밥을 먹는다는 사실에 순간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밖에서 스스로 초래한 고생에 의해서 못 먹고 잘 못 자고 다니다가 먹은 따뜻한 밥 한술과 뜨끈하고 달큰한 고추장찌개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 한 끼 중에 하나이다.


고추장찌개, 고들빼기김치, 돼지 생강구이, 발사믹 샐러드, 현미밥


'할머니, 이건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냥 요렇게 저렇게 잘 끼리면 대, 마. 너무 묻지말그라. 밥이나 퍼무.'



그리고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그 할머님께서 아흔이 넘은 지금도 나는 그 고추장찌개 맛을 잊지 못하고 집에서 곧잘 끓여먹는다. 강원도에서는 그리 맛을 볼 일이 거의 없는 찌개라 집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곧잘 신기해하는 메뉴이기도 하다.



돼지고기를 고소한 참기름에 뚝배기에 손질해서 볶아서, 무심하고 큼지막하게 다져놓은 양파를 같이 넣어주고 한 소금 끓인 물에 고추장을 퍼넣고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꿀을 살짝 섞고 원하는 대로 두부나 애호박도 썰어 넣는다. 간은 소금으로 해도 되지만 나는 새우젓으로 간을 하는 것이 더 맛이 진하고 구수하다. 그리고 고춧가루도 살짝 더 추가해주면 더 매콤하게 즐길 수 있다. 취향에 따라서 붉거나 푸른 고추를 썰어 넣어도 된다.



전라도에는 이 고추장찌개(식당에서는 애호박찌개로 부른다)만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식당도 있으니 전라도에서의 이 고추장찌개의 위엄이란....!



작년 추석에 친가의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는 나의 요리들에 대해 썰을 풀어놓으며 할머니가 예전에 끓여주셨던 그 고추장찌개에 대한 추억을 내놓았었다. 아버지, 숙부님, 고모 등을 비롯한 친가 친척들은 



'마, 내도 울 엄니가 끼린 고추장찌개를 무 본적이 없는데... 게 머선 말이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진심으로 신기해하셨고, 나는 할머니의 유일무이했던 고추장찌개를 맛보았던 사람으로서 무언가 어깨가 으쓱해졌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쇠약해지셔서 많은 음식들의 비법은 숙모님께 전해졌지만 이 고추장찌개만은 내가 전수(?) 받은 것이 내 자랑이다.



먼 훗날 할머님께서 우리의 가슴속에서 살아가시는 날이 오더라도, 그녀의 음식만은 잊히지 않고 계속 뜨거울 것이다.



마, 그냥 요렇게 저렇게 잘 끼리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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