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고로 Jun 08. 2022

[픽션] 극락식당-외전

생명의 전화 - 할배와 형식이

또 떨어져 버렸다, 나만. 나만, 나만, 나만, 무엇을 하든지 어떤 곳으로 지원을 하던지 무슨 계획을 세워서 실행을 해도 이전보다 지금이 더더욱 되는 일이 없어지고 있다. 쓰고 지웠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여러 장, 나를 뽑아도 되겠는지 얼굴은 한번 보겠다며 으스대거나 엄격한 얼굴로 마주 보던 인간들도 수십 명. 몇 번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한결같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들은 어제도, 오늘도, 지금도 같다.


그래, 나에게 문제가 있겠지. 내가 부족한 것이겠지, 내가 모르거나 준비가 안 된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이력서에 일일이 나열되어 있는 대외활동의 경력들과 학과, 학점 들은 왜 너는 그 시간과 돈을 들이고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냐며 아우성을 외치며 나의 마음을 압박한다.


머리는 혼란스럽고 마음은 허탈하다, 오늘 면접을 보았던 곳마저 떨어졌으니 이제 또 어디를 지원하고 또 생각해야 하나. 아껴두었던 생활비를 또 쪼개고 쪼개서 살 생각에 눈앞이 캄캄하고, 인력시장에 나가서 막노동이라도 하려고 하니 염치없게도 걱정이 앞선다.


터덜거리는 마음으로 비틀거리며 그렇게 버스에서 내려 집 근처 골목을 지나 귀가를 하던 도중이었다, 내가 그것을 마주친 것은. 회색 담장과 불규칙스럽게 깨진 병조각들로 장식이 된 을씨년스러운 담장과 전선, 통신선, 까치집 등 따갑고 복잡한 시선에 쭈그러져 버린 내 모습과 닮은 전봇대 사이로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공중전화 부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불나방과 파리와도 같은 목숨을 가진 벌레들이 한순간의 희락을 위해서 파닥거리는 형광색의 가로등, 그 근처에 갑자기 내 눈에 들어온 빨간 공중전화 상자. 그리고 더 눈에 띄는 것은 그 위에 피어나 있는 하얀색 꽃. 모순적이다, 기계로 된 통신장비 위에 피어난 살아있는 식물이라니.


우리 집 앞 골목길에 전화 상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내 기억력을 시험하고 있었던 내가 답답했던 것일까, 마음속에 있던 작은 호기심이 나의 발걸음을 먼저 앞장서게 했다. 전화박스에 다가갈수록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하얀색 장미, 국화 그리고 민트색의 작은 공중전화기. 지금의 시대에는 잘 쓰지 않는 전화카드도 되고 동전도 쓸 수 있다고 전화기에 붙어있다. 전화기를 유심히 보던 나는 공중전화 유리벽에 친절하게 인쇄되어 있는 설명 스티커를 읽어 내려갔다.



'생명의 전화


이 전화를 발견하게 된 당신, 혹시 심각하게 삶에 절망하여

자살이라도 생각하고 있으신가요?'


어.... 그렇지.... 마음속에 어느 정도는 이제 그냥 죽으면 이생에 대한 고민이나 고통 없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지.


'잠시만 지금의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과 짧고 따뜻한 대화의 시간 어떨까요?


이미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아 꿈에서라도 봤으면, 죽어서라도 만나 이야기라도 해봤으면 하는, 당신이 사랑하던 이와 연결해드립니다. 지금 바로 수화기를 들어보세요.


본 사업은 이승복지관리부의 시험사업이며 통화내용은 녹음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람. 죽은 사람과 연결해주는 전화기라니, 그것도 공중전화박스에서. 그래, 겉으로 보기에는 하얀색 꽃들로 장식된 전화기와 원래 없던 곳에 갑자기 솟아난 상황으로 보아서는 내가 현실에 있는지 아니면 잠시 어디선가 쓰러져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래도 이야기를 할 사람이 절박하게 필요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마음의 위로가 필요했다.


"속는 셈 치고 해 볼까."


어디서 갑자기 용기가 생겨났는지 아니면 전화박스에 붙어있던 설명서에 속아 넘어갔는지, 나는 전화기 앞에 놓인 통화용 간이의자에 앉아 손에 들고 있던 서류가방은 잠시 옆에 내려놓고 수화기를 무작정 들었다. 누가 나의 전화를 받을지는 알지 못한 채. 수화기를 들고 귀에 대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상대방과 연결 중입니다


라는 말과 함께 비발디의 사계 중 ''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철컥


"여.... 여보세요...?"


[어, 그래, 행식이가?]


굵고 낮은 걸걸한 노인 남성의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 약 20년 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던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돌아가신 탓에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 있었었다, 어릴 적부터 나를 포함한 모든 손자, 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셨던 분. 누가 뭐래도 당신의 손자, 손녀들에게는 칭찬과 격려 가끔은 충고로 자존감을 치켜세워주시던, 따뜻한 참 어른이셨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흑흑..."


[마... 우나? 와, 우노? 할배가 그리 보고 싶었나?]


예상치 못하게 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던, 사랑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자 걸어오면서 꾹꾹 참고 있던 서러움과 힘듬이 끝없이 쏟아지는 폭포처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변에서 다 잘될 거라고 괜찮다고 격려해도 '괜찮아, 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강하게 지키고 있던 벽이 할아버지의 목소리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아, 나는 사실 괜찮지 않았다. 나는 괜찮지 않다, 너무 아프다, 힘들고 외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 할아버지, 뵙고 싶었어요.. 흑흑... 마지막도 못 뵈고 보내드렸는데..."


할아버지의 너털웃음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고거는.. 마, 다 괘않타. 그거는 내 죽을 운명이 다 그렇게 된기니까는, 마음 쓰지 말그래이. 요새 형식이는 건강하고 별일 없제?]


"네, 저는..."


평소 습관처럼 '저는 괜찮아요, 아무 일 없어요.'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엄청난 행운으로 통화를 하게 된 할아버지 앞에서마저 '괜찮다'라고 웃으며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한번뿐이고 내가 하는 말은 할아버지 외에 그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을 것이기에,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는 털어놓기로 했다.


"... 요즘 많이 힘들어요, 할아버지."


[뭐가 그리 힘든데. 와, 여자한테 차있나?]


"차라리 여자한테 차였으면 이렇게 비참하지도 않았겠죠. 직장 문턱에 치이고, 사회에 치이고, 돈에 치이고, 잘난 남들에게 치이고... 어디를 가던 치이는 곳 투성이에요."


[허허...그래?느가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제? 마, 욕본데이. 사는 게 많이 데다, 그제?]


"처음에는 어디서 무얼 하던 어떻게든 살 수 있겠지 자신감 넘치던 내 모습은 어디를 갔는지, 하려고 하는 것마다 되지 않아요, 할아버지. 오늘만 해도 떨어진 게 10번은 넘어가요, 이제는 또 어디에 가야 할지, 내가 하려고 하는 이 길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끄윽.. 끅..."


중간중간 눈물을 머금으면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말을 길게 하다 보니 계속 눈물이 나오고 감정이 터져 나오면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멈추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수화기 반대편의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 우리를 안아주시던 그 모습 그대로, 묵묵히 나의 슬픔과 이야기를 받아주셨다.


[기래... 사는 게 참 글체? 할배도 참 마이 실패하고 느머져가꼬, 느 할매한테 욕도 마이 묵꼬... 허허... 잘한 게 읍따.]


"할아버지도요...? 그때마다 안 힘들셨어요?"


[하모, 힘들제. 쎄가 빠지게 힘든데 그래도 목숨 달린 거 살아야제, 안 그렇노. 그냥 마 '치아라' 할 수는 없는기다, 사람 목숨이란 게. 사람 죽는 것도 쉽지 않데이. 그래도 그 와중에 행식이 니처럼 뭐라도 하면서 발버둥도 치고, 울기도 하고, 신세한탄도 해보고, 여기저기 박아보기도 하고, 배가 조금 굶기는 해도 뭐라도 해볼라꼬 나아가는 게 중요한기라.]


'나아간다'라... 그래, 무언가라도 하면서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면 어느 곳도 가지는 못한다. 지금 내가 가는 곳이 맞는지 나에게 의심이 들더라도, 내가 어디론가 가려는 곳이 없어도, 그래도 이 인생에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행식아, 그냥 가만히 죽어 삐면 다 끝인 것 같제? 음청 편하고 디비자고 있으면 좋을 것 같제?그거 아이다, 행식아. 죽고 나면 또 죽은 대로 힘든 기다, 저승에 와가꼬 '아 살아있을 때 그거 와 안 했나' '살아있을 때 그 말 좀 할걸'이라믄서 가슴 치고 후회하는 인간들 안 봤겠노. 행식아, 지금은 힘들어도 니는 할 수 있데이. 느머져가꼬 구르고케도 무르팍 까진 거 그거 탁 치고 일어나그라, 힘들면 조금 쉬어따가도 된다, 아무도 뭐라꼬 안 한다.]


그래, 내가 너무 나한테 엄격한 기준을 잣대로 들이대고 스스로를 밀어붙였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러 번 실패했어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


[원하는 게 한 번에 딱 안 데도 으떻노, 길만 있으면 우찌 되었든 간에 돌아가도 되는기라. 조금씩이라도 걸어서 쉬엄쉬엄이라도 가면 되는기라. 느한테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래이.]


"예... 예, 할아버지.... 흑흑....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와의 짧은 통화였지만, 할아버지의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지치고 헤졌던 내 마음을 천천히 추스를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그래도 계속, 내가 살아있는 한, 도전하고 걸어야겠다는 마음.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 어디선가 샘솟아 나를 채웠다.


[행식아, 할배는 이제 시간이 다 되가꼬...이만 끊는데이, 잘 지내그라.]


"네,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또 뵈어요."


전화통화를 마치고 부스에서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연보랏빛의 하늘은 어느 때보다도 새카만 밤하늘이 되어 내 위를 뒤덮고 있었다. 나는 눈물로 적셔 붉고 촉촉해진 양 눈과 볼을 셔츠 소매로 쓱 닦으면서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밤하늘의 누구보다도 밝고 영롱하게 빛나는 수많은 별빛을 위로 삼아.








작가의 이전글 단팥죽과 호박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