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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Jun 10. 2022

영혼을 위한 마르게 리따

공허하고 불안한 속을 채우는 구수하고 따스한 위로의 한 끼

"우리 잠시 산책하러 갈까"


"그래"


인생을 살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에 있어서 잘 익은 사과나 배처럼 달콤한 일만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러한 열매들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씨를 심고 나무가 자라나는 것을 기다리며 해충과 병해를 이기고 따스한 햇빛과 촉촉한 물을 뿌려주기도 하고, 강풍과 고온의 계절을 맞부닺치며 이겨내야 달콤함이 있는 것이기에.


무력감과 불안감, 갑갑함이 나의 마음을 점점 옥죄어 오기 시작하는 과거의 어떠한 날이었다. 야심 차게 모험을 시작하겠다며 용기를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세상이라는 것은 역시나 내가 원하던 대로, 내 계획대로, 내 예상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능력과 삶이라는 것이, 내가 이 사회와 환경에서 이렇게 환영을 받지는 못하는 것일까라는 생각부터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과거와 그 과정 중에 있었던 결정들까지 모두 부정당하고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라며 누군가가 나의 멱살을 잡고 강요하는 기분.


목과 가슴이 조여와서 점점 숨이 쉬어지지 않는 느낌,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지만 슬픔'도' 나누면 배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지금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불안감과 두려움, 괴로움을 옆에 있는 나의 이쁜 여자에게 털어놔서 현실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없기 때문에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굳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에 나 때문에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갑갑하고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나가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잠시 산책을 하고 싶었다. 숨을 쉬기 위해서.


이쁜 여자와 나는 여느 때처럼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밤 산책 길을 나섰다. 큐빅과 전등이 박힌 암막커튼이 강릉의 하늘을 덮고 강한 바람에 펄럭였다. 나와 이쁜 여자는 보통 때라면 서로가 가진 생각이나 재밌는 상상,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낄낄거리며 걸었겠지만 그날은 그러지 못했다. 밤처럼 어두운 기운에 휩싸인 나를 바라보면서 이쁜 여자는 나에게 말을 걸지 못했고, 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공허한 어두움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앞으로, 터벅터벅 걷기만 했다.


평소의 짧고 빠른 산책의 보폭이 아닌 느리고 힘없는 처량한 걸음. 우리는 말없이 항상 가는 그 장소로 가기 위해 언덕을 넘고 길을 건넜다. 그 장소, 강릉 시내 전역과 강릉을 둘러싼 대관령의 능선들이 한눈에 보이는 곳. 하늘에 올라가지 못한 별빛들이 땅에 묶여 빛을 내는 곳. 우리의 신혼 시절 행복한 기억이 아직도 춤을 추고 잇는 곳, 그곳에서 나와 이쁜 여자는 땅에서 반짝거리는 별빛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을씨년스러운 바람만 맞았다. 말이 없었다기보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그리고 과거의 기억 중에 있던 어느 행복하고 따뜻한 기억,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서 먹었던 새로운 맛, 10대의 원기 왕성하던 날 이탈리아 아저씨가 해줬던 그 눈이 번쩍 뜨이는 맛, 20대의 혼란스럽고 복잡하던 그때 잠시나마 나의 하루를 바꿔주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던 그 맛, 30대의 나에게 위로와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그 맛. 오븐에서 피어 나오는 구수하고 달큼한 밀가루 냄새와 새콤하고 감칠맛 넘치는 토마토소스, 혀를 감싸는 쫄깃한 치즈와 코를 덮는 향긋한 바질, 그 따뜻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나의 마음속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마르게리따, 샌마르, 강릉


구수하고 바삭하며 쫄깃한 그 얇은 도우의 식감, 새콤하며 상큼한 토마토, 고소한 치즈와 옅은 허브의 향은 아주 잘 익은 에티오피아 원두로 내린 필터 커피와도 같은 효과를 준다, 아무리 기분이 좋지 않았던 하루도 정반대로 밝게 전환해버리는 마법의 음식인 것이다. 멍하니 앞만을 보면서 이쁜 여자와 걷던 그 와중에 푸근한 불빛 아래에서 그녀와 함께 마르게리따를 나눠먹으며 행복했던 기억이 났다. 그 시간과 공간, 분위기가 그리운 것이다.


다음 날, 운 좋게 찾아온 여러 기회들 덕분에 나의 숨통이 트이고 기운을 어느 정도 차린 무렵에 나는 이쁜 여자에게 우리의 단골 피자집에 마르게리따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이쁜 여자도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오늘 마르게리따 먹으러 가자고 했었어"라고 말하며 함께 좋아했다.


나와 이쁜 여자의 추억이 가득한 곳 중 하나인, 강릉 시내 골목에 자리 잡은 그 피자집의 손님이 없는 그 한적한 시간대에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마르게리따 피자를 먹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 맛이 나의 마음과 영혼까지 따뜻하게 치유하고 안아주는 그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에 나의 눈가가 촉촉해질 뻔했지만 그렇게 감성적으로 멍하니 있으면 피자를 못 먹기 때문에 이쁜 여자와 맥주를 나눠마시며 최대한 그 피자의 맛과 공간의 분위기를 즐겼다. 그 피자를 만들어주신 사장님은 (이 글을 보지 않는 한) 절대 모를 것이다, 내가 그날 어떠한 마음으로 늦은 시간에 피자를 먹으러 갔었는지 말이다. 그날, 그는 내 영혼을 감동시킨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나의 마음이 힘들거나 이쁜 여자가 힘들어하는 시기는 없지 않을 것이다, 항상 생길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그게 인생이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만져주던 그 따스한 토마토소스가 발린 넓적하고 둥근 빵을 생각하며 (혹은 먹으며) 잠시나마 위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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