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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Sep 04. 2022

[미식일기] 유즈라멘, 서울

심해(深海)에서 올라오는 상큼한, 육수에 경의를

"Comma씨,  내일모레에 서울에 이틀 정도 출장 다녀와요. 내가 서울 본사에 연락해 놓을게."

"넵, 알겠습니다, 팀장님."

"그리고 서울 사무소 근처에 엄청 맛있는 일식 라멘집이 하나 있어, 서울역 뒤편 만리재길이라고 있는데 그 근처거든. 내가 거의 일주일에 한번씩은 가던 초 맛있는 라멘집이라구~ comma씨 맛있는 것 좋아하잖아? 거기도 이번에 가는 김에 한번 다녀와, comma씨가 다녀오면 뭐라고 후기를 남길지 매우 기대되거든."

"유즈... 라멘이요? 아, 서울 일식 라멘 목록에서 한 번 봤던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맛있는 집인가요?"

"그럼, 우리 같은 직장인들은 말이야, 거기 점심시간에는 줄 서느라고 먹기 힘들고 저녁에는 퇴근하자마자 부리나케 뛰어가야 먹을 수 있다고."

강릉 사무소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분은 J팀장님과 균, 그중에서 J팀장님은 소식가이시지만 한식과 고기를 (특히 삼겹살, 아침에 삼겹살을 구워 먹을 정도로) 상당히 애정 하시는 분이다. 한식이 아닌 음식의 경우 상당히 맛이 있어야 '맛있다'라고 인정하시는 분께서 일식 라멘집을  추천하는 경우, 이 집은 'J팀장님께서 맛있다고 추천하는 집이라면 대체 어떤 라멘집인 걸까?'라는 호기심이 불쑥 올라올 정도로 나에게도 가고 싶은 마음을 크게 일으키는 것이었다.

유즈라멘이 얼마나 맛이 있고 먹기가 쉽지 않은 곳인지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얼굴로 나에게 이야기를 하시는 팀장님의 모습은 함께 근무하는 시간 중에 제일 즐거운 모습에 손꼽힐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다, 맛있는 음식이 직장인에게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이란, 얼마나 맛이 좋으면 그 음식을 생각하고 얘기하는 내내 사람에게서 빛이 뿜어 나오게 하는 것일까. 진정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은 손님으로 하여금 스스로 홍보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서 볼 수 있었다.

'유즈 라멘이라.... 저번에 봤던 미식가들의 일식 라멘 목록 중에서 봤던 기억이 있어...'

나는 서울과 강릉을 왕복하는 ktx 열차를 빠르게 예매하는 와중에도 유즈 라멘에 대한 자료들을 검색해보며 어떠한 음식을 먹게 될 것인지, 한 번의 시도에 다양하고 심도 있는 자료를 수집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며 곧 다가올 출장 계획을 세웠다. 마침 수, 목요일이니 그 이틀간 휴무를 갖는 바리스타인 '곰군'을 일산에서 서울로 소환해서 라멘과 커피와 맥주 한잔으로 이어지는 미식 코스를 시행할 계획을 세웠다.

"유즈라멘은 시오라멘이 정말 맛있어, 쇼유라멘과 시오라멘이 주 메뉴이고 그 외에 다른 메뉴인 츠케멘도 있는데 츠케멘도 얼마나 맛있다고. 모든 메뉴가 다 국수와 육수가 추가가 되는데 츠케멘은 추가가 안되니까, 츠케멘 먹을 거면 처음부터 큰 걸로 주문해 comma씨, comma씨는 많이 먹잖아."

"하하, 그런 팁들까지, 감사합니다 팀장님."



며칠 후, 서울.

아침에 비가 와장창 쏟아지던 강릉역에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게 된 나는 저녁에 있던 업무를 무사히 마치고는 서울 사무실이 자리 잡은 건물의 1층 로비로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내려갔다.

"형!"

"어이! 오래 기다렸냐?"

"아냐, 아냐, 별로 안 기다렸어."

강릉에 살던 때보다는 비교적 군살이 많이 빠져서 탄탄해진 바리스타 '곰군'과 반가운 포옹을 가볍게 나누고 우리는 서울역 방향으로 빠른 걸음을 시작했다. 서울역 뒤편의 만리재길은 수많은 식당들과 카페, 펍들로 이루어진 서울역 근처 직장인들과 서울역을 오가는 인파들이 오갈만한 지역이었다. 서울역 앞을 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회현역 방향에서 서울역 뒤편으로 가려면 수많은 도로들과 지하도로, 지하철역, 육교, 횡단보도들로 이루어진 교통미로를 풀고 나가야 만리재길로 닿을 수 있다.

만리재길로 가는 것은 초행길이라 초록색 지도창을 참고하며 보면서도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지, 육교를 건너야 하는지, 지하도를 가야 하는지 이래저래 우리는 헤매다가 인공 숲으로 꾸며진 기다란 육교를 건너서 만리재길 근처로 갈 수 있었다. 만리재길로 가는 동안에 우리는 서로의 직장과 직장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에 대한 것들을 식전 요리처럼 나누며 유즈라멘으로 향했다.

"저기 있네, 저 커다란 유자가 간판에 있구먼."

"아~ 저래서 유즈라멘이군요? 저는 이 동네 처음 와봐요."

"서울역은 몇 번 와봤지만 여기는 나도 처음이야."

대나무와 비닐로 빽빽하게 이루어진 대기 장소를 지나니 복층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구조의 식당이 매끈거리는 갈색의 인테리어를 내뿜으며 우리 눈앞에 등장했다. 아래층에는 뜨겁고 밝은 주방이 김을 뿜었고, 계단을 지나서 올라가는 위층에서는 라멘을 각자 한 그릇씩 받아서 후루룩 거리는 손님들이 김을 뿜으며, 바깥이 습하고 더운 날씨였지만 내 안경이 김이 서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장관이었다.

서울역 유즈라멘에 처음 와보는 이방인들을 맞이하는 전자주문기기 앞에 서서 우리는 각자를 위한 라멘을 주문했다. 시오라멘(소금라면), 쇼유라멘(간장라면)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가라아게(닭튀김), 거기다가 팀장님이 꼭 1개 더 시키라고 했던 두툼한 차슈를 각자 1개씩 더 주문했다. 이 정도면 배가 어느 정도 찰 거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온전히 라멘을 즐기기 위한 바 형식의 식탁에 다른 손님들과 나란히 앉아서 식당에서 기본으로 제공되는 곡물차를 따르고 파김치를 썰어서 놓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리고 축축한 날씨여서 실내도 살짝 어둡고 흐린 공기가 흘렀지만 따뜻한 주방의 분위기와 라멘을 활기차게 먹는 손님들의 힘이 흡사 이곳을, 커다란 일식 라면 포장마차로 보이게 만들었다.

벽에 보이는 라멘에 대한 이러저러한 정보는 라멘을 먹기 전에 이미 나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시오라멘의 육수는 닭과 여러 해물을 우려낸 해물육수를 반반씩 섞어서 나온 진하고 깊은 육수, 차슈는 이베리코 목살을 사용한다고 하며 가능한 모든 종류의 목살을 다 사용해서 시험해봤지만 이베리코 목살이 본인들이 추구하는 차슈의 맛에 제일 적합하다고 하는 설명에는 유즈라멘이 제공하는 차슈에 대한 당당함과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라멘 나왔습니다~ 뜨겁습니다~"

시오라멘
쇼유라멘


맑고 노릇해 보이는 육수에 매장에서 직접 뽑은 매끈하고 얇지만 탄탄해 보이는 면발, 그리고 그 위에 탈듯말듯 강하게 철판에서 구워지고 그을려진 스테이크만큼 두툼한 목살 차슈, 그 사이에 수줍게 고개 내민 맛달걀과 그 옆을 장식하는 청경채와 죽순, 단순해 보이는 토핑과 라멘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내 옆, 곰군이 받아 든 쇼유라멘에서는 훈연향이 살며시 피어올라오고 있었다.

"먹어볼까."

"잘 먹겠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국자로 시오라멘의 육수를 한 국자 떠서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와

호로록

"어후...." 탄성이 터진다, 자연스럽게.

처음에는 닭 육수의 진한 고기 맛과 고소하고 깔끔한 그 맛이 혀에 닿는 듯하더니 저 깊은 바다 밑에서 커다란 그물을 끌어올리는 듯한 깊고 깊은 맛, 일반적으로 먹는 해물칼국수나 라면에서 먹는 그러한 해물육수보다 더, 더, 더, 깊은 바다의 시원한 맛이 깊고 어두운 심해에서 올라오는 '깊은 맛'이 아닌 '깊이가 있는 맛'이었다.


"형, 진짜 맛있어요" 옆에서 쇼유라멘을 먹는 곰군의 말은 들릴 듯 말 듯, 나는 다시 한번 시오라멘의 육수로 입을 적신다.

호로록

"와......." 또 탄성이 터진다, 같은 이유로.

어떻게 이 맑고 가벼워 보이는 육수에서 이렇게 깊은 맛이 샘솟는 것일까, 대체 해물 육수를 어떻게 조합해서 우려낸 것이지? 바지락과 굴 등으로만 단순한 한, 두 가지의 재료로 이러한 맛을 내는 것일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한두가지 재료로 내는 맛은 아니라고 생각해, 만약 그렇다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여러 가지 해물로 낸 것이야.

나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나의 자아들이 이 해물육수의 깊은 맛을 두고서 열렬한 토론을 펼친다. 닭 육수의 고소함과 진한 고기 맛은 아주 표면적인 맛일 뿐이다, 시오라멘 육수 맛의 핵심에는 아주 깊고 깊은 바다에서 끌어오는 시원한 해물맛이 있다.

"곰군, 쇼유라멘 좀 먹어볼게."

"네, 저도 시오라멘 좀..."

쇼유라멘을 한입 입에 적시니 시오라멘의 육수만큼 깊은 맛이 표현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뭉근한 훈연맛과 감칠맛과 달큰한 맛이 혀와 입안 전체를 감싼다. 한입을 먹으니 또 한입, 그리고 또 한입을 먹고 싶어지는 그 달착지근한 맛과 함께 훈훈한 향이 코로 슬금슬금 올라온다. 확실하게 다른 종류의 국물 맛이 확실하게 매력적이다.

"이제 면을 한번 먹어볼까."


면 자체는 건조했으며, 찰기가 많은 면은 아니다. 다만 탄탄하고 단단하고 입안에서 꼭꼭 씹히는 단순하고 심심한 맛이 화려하고 풍부한 식재료의 맛을 자랑하는 육수와 좋은 균형을 맞춘다. 그리고 맛달걀도 적당히 짭짤하면서 탱글 거리고 말랑거리는 식감을 자랑한다.

"이야, 이거 차슈 두께 좀 봐"

"진짜 두껍네요."


입을 크게 벌려 거무스름하게 직화로 구워진 모습을 자랑하는 차슈를 덮친다. 치아 사이에서 말캉거리고 으적거리면서 씹힐 때마다 구수한 육즙과 그 사이의 고소한 기름기가 함께 새어 나오고 그 틈새로 자리 잡고 있던 지방질들이 터져 나오면서 살코기와 기름의 훌륭한 협력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니 저절로 눈이 감기면서 혀와 치아에 느껴지는 두툼한 이베리코의 목살만을 그 시간에 온전히 감상한다. 돼지고기이지만 이 깔끔하고 고소하며 맑은 지방질과 쫄깃한 살코기. 아, 이 정도의 차슈가 결과물이라면, 이 차슈를 위해 희생된 이베리코 돼지에게 영광을 돌리며 '너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어'라며 진심 어린 경의까지 올릴 정도이다.

한번 젓가락을 집어서 한입을 물어뜯으니 차마 멈출 수가 없다, 넓고 두꺼운 그 이베리코 차슈 한 조각을 다 먹어치우고서야 나는 다시 육수 국자와 면발을 집어 들었다.

'이래서 차슈를 꼭 하나 더 시키라고 하신 거구나'

나에게 차슈 추가 주문에 대한 조언을 해주신 J팀장님께도 시오라멘의 육수만큼이나 깊은 감사를 담아 표하고 싶었다.

우리가 라멘을 반 정도 먹었을 무렵, 나는 육수에 상큼한 변화를 주기 위해서 앞에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던 고흥 유자로 추출한 유자액을 집어 들었다. 신맛이 이 육수에 추가된다면 이 안에 있던 깊은 맛과 고소함, 진한 육수 맛이 더 끌어올려지겠지. 나는 주나라의 왕을 기다리던 강태공과도 같은 마음으로 유자액을 집어 들고 깊고 깊은 바다 맛의 육수에 상큼하고 샛노란 찌를 드리웠다.

순식간에 유자액은 육수 사이로 녹아들고 그 사이에 공기 중에 남겨진 유자액의 향기인지, 내 코를 자극한다.

'기대되는군. 어떠한 맛이려나.'

나는 이제 육수만이 담긴 라멘 사발을 양손으로 경건하게 집어 들고 얼굴로 독대한다. 상큼하고 진한 냄새가 나에게 이 맛을 허락한다고 얘기하는 듯하다.

'간다'

호로록

상큼하고 시큼함이 어우러진 첫맛에 이전보다 더 고소하고 깊어진 해물닭육수의 제일 깊은 중심의 시원한, 그 원초적인 육수의 맛이 혀뿌리를 타고 따끈하게 마음에 닿는다.

".......... 오..."

감히 함부로 탄성을 내뱉기가 어렵다.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인다, 이 맛을 그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깊고 진한 육수의 맛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이 맛을 허락하여 주심에 경의를 표하는 자세밖에 나는 갖출 수 없는 것이다.

옆에서는 곰군도, 곰군 나름대로 쇼유라멘과 독대를 하며

"와, 이거 말로 표현은 못하겠는데 진짜 맛있어요. 처음 먹어보는데, 진짜."라고

본인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라멘에 대한 경의를 올리며 그만의 미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멘은 사실 돈코츠라멘이기 때문에 여기서 돈코츠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쉽지만, 그래도 깊은 곳에서 끌어 올라오는 맛을 라멘에서 맛보았기에 큰 기쁨으로 나는 곰군과 유즈라멘을 나섰다. 다음에 오게 된다면, 꼭 츠케멘을 먹어야겠다, 결심한다. 나는 유즈라멘의 츠케멘에게 어떠한 경의를 갖추게 될지, 알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p.s. 가라아게도 바삭하고 쫄깃하고 부드러우며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맛이었지만 라멘과 차슈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라멘과 차슈에 대한 글만 적었음에, 심심한 사과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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