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을 즐겼던 개인주의자 스물 아홉 여성
"결혼하니 어때? 결혼하고 좋은 점이 뭐야?"
달마다 독서모임 하는 친구 Y가 물었다. 질문을 듣고 결혼 생활 만족도를 잠깐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만족스러웠으며 무엇이 참을 수 없는 불만이었지?
결혼한 지 9개월이 지난 지금,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았을 때 참을 수 없는 불만이 바로 떠오르지 않으며, 만족스럽다고 느낀다.
오히려 결혼 전에는 예민하고 뾰족했더라면 요즘엔 좀 덜한 느낌이랄까. 그 느낌이 나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덜할까? 왜 안정감이 들까를 생각하다 말문을 열었다.
"같이 살아본 적 없는 두 사람이 만나 생활하므로 불편함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인 거 같아.
그런데 내가 만족하는 이유는 일단 전제조건 두 가지가 있어야 할 거 같아.
먼저 나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개방적인 삶을 지향하잖아. 그래서 결혼함으로써 주어지는 한국 문화와 관습에 연연하지 않아.
명절에도 남편과 둘이 시간을 보내고 양가 부모님을 따로 뵈지 않았어. 양가 부모님 모두에게 연락을 하는 편이 아니고. 양가 부모님도 그러한 관습과 책임을 요구하지 않아.
그리고 두 번째는 나와 남편 사이 집안일에 대한 분담이 반반이라는 점이야.
남편이 요리를 하면 내가 설거지를 담당하고, 반대로 내가 요리를 하면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같이 요리를 할 경우에는 번갈아가면서 설거지를 하고.
오차 없이 5:5 분담을 나누기는 어렵지만 청소, 빨래 등 집안일에 있어서 합리적으로 분담한다고 느껴져서 크게 불만이 없어.
오히려 혼자 살 때는 저녁 먹을 때 너무 조용해서 영화라도 틀어놨는데, 결혼하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점이 나은 것 같기도 하고..."
핵심을 말하지 못한 채 헤매며 전제조건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친구 Y의 표정을 읽었다. 그래서 좋은 점이 뭔데?라는 표정.
Y는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친구로 나와 가치관과 미묘한 감정을 공유하는 사이다. 그런데 지금 서로의 감정이 공유되고 있지 않은 느낌이다.
정녕 결혼이라는 것이 고작 관습이 얽매이지 않고 집안일을 5:5 분담해서 좋은 것인 건가? 그렇다면 비혼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혼하지 않으면 관습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집안일이 두 배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스스로도 말하면서 대체 왜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에 대해 생각을 또 한번 거듭하다 최근에 집에서 편안하고 재미있었던 날들을 떠올렸다.
생각을 해보니 대체적으로 재미있던 날들은 할 일을 끝내고 하루가 얼마 남지 않은 밤 10시 넘어서의 시간이다.
그런데 왜 좋았지?
"말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사실 좋은 점이 있어. 말하다 보니 정리가 된다. 이게 나에게 가장 안정감에 들게 하는 거 같아.
음 말하기 좀 그렇긴 한데 내가 인간관계에서 가끔 굉장히 옹졸한 감정이 들거나, 옹졸한 생각으로 행동을 했을 때, 스스로 돌이켜 생각하면 유치해서 아무에게도 못 말하는 그런 거 있잖아.
아무에게도 못 말하는 감정을 저녁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아. 너무 사소하지만 한 3일 생각나는 감정있잖아.
예를 들어서 내가 만약 빼빼로데이에 편의점에서 빼빼로를 사려고 하는데, 30분 뒤 만날 친구 빼빼로까지 산 거야. 친구를 만났는데 오늘따라 친구가 내 말에 공감을 안 해주는 느낌이 들어. 그게 표면적인 게 아니라 아주 미세하고 느낌적인 느낌말이지. 그 미묘한 억양과 감정선이 마음에 걸려서 주기로 한 빼빼로를 가방 속에서 꺼내지 않은 거야.
사실 빼빼로는 1000원밖에 하지 않고, 그 친구에게 주려고 산 건데. 미묘하게 친구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아 1000원짜리 빼빼로를 꺼내지 않은 그 감정?
그런 옹졸한 감정을 저녁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아."
"더불어 내가 이런 감정이 들었는데 너무 과민한건지 아니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인지 다른 사람 시선에서 비교적 객관적인 의견을 들어보는 게 좋아.
만약 그 상황은 넘어갈 수 있었던 문제라고 하면, 아 내가 조금 그랬나?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도 해.
이것뿐만 아니라 실제 어떠한 상황에서 이러한 감정을 느꼈는데 이게 과민한 건지 화내야 할 상황인지 판단이 필요할 때도 있고.
확실히 나보다 둥글둥글해서 그런지 내가 갇혀서 화를 냈던 상황이 그럴 상황이 아니었구나라고 넓게 바라보게 해주는 거 같아.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니, 같은 상황에서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나와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거 같아."
"다른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에 대해 편견이 생길 수 있잖아. 너무 센시티브하고 옹졸한 사람이라고.
나는 매사에 그런 사람이 아니고, 나의 여러 면 중에 오늘따라 그 면이 조금 나온 것뿐인데. 나를 오해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 걱정되니 그런 날 것의 감정은 가감 없이 이야기하지 않지.
그런데 남편에게 그러한 옹졸한 감정을 이야기해도, 나를 그렇게만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아니까. 가끔은 무작정 위로가 아니라 내가 잘못된 점을 가감 없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한두 가지 면만 보고 나를 그러한 경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 오늘은 얘가 이런 면이 나왔구나 하고 온전한 내 모습,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이해하는 사람이니까 술술 말하게 돼."
그제서야 Y에게서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거면 충분하다는 표정.
독서 모임이 끝나고 결혼 생활을 곰곰이 생각하니, 할 일을 끝내고 이야기하는 저녁 시간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저녁에 밖에서 일어났던 말 못 할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내 옆에 있다는 게 안정감을 들게 했던 것이다.
별게 아니라고 판단해 줌으로써 별게 아닌게 되기도 하고, 충분히 그런 감정이 들 수 있다는 말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가끔은 작지만 소심한 복수 방법을 도모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평생 말하기 어려운 사소한 것까지 수다 떨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평생 내 편이 있다는 느낌이다.
혼자 살 때는 저녁에 샤워하고 좋아하는 영화를 매번 돌려보며 맥주 몇 캔 마시고 잠들기 일쑤였다. 누구에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에 걸린 오늘의 상황과 감정이 밤에는 유독 동영상을 처음부터 보는 것처럼 떠오르곤 했다. 중간 중간 왜 그때 그렇게 행동했지?라는 자책하는 마음은 덤.
일상의 소소한 스트레스를 좋아하는 영상을 보면서 맥주 마시고 잠드는 것으로 해소했다.
Y에게 말하다 보니 결혼하고 좋은 점은 저녁 시간이 편하고 재밌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의 할 일을 끝내고 저녁 10시 넘어서 맛있는 안주와 함께 맥주 마시는 것. 그리고 수다 떨고 놀다가 양치만 하고 바로 잠들 수 있는 사람이 항상 있다는 것.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상 생활에서 삐걱대긴 하지만, 삐걱대면서 나타나는 불편함을 감수할만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항상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