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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흔들면 됐는데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원시적인 리셋 버튼, 흔들기.

by 기억상자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정체불명의 장난감이 하나 있었다.


빨간 테두리에 다이얼이 두 개 달린,
화면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주 이상한 녀석.

요즘 아이들은 이름부터 묻겠지만,
그 시절엔 그냥 “그거, 알지? 그 흔들면 지워지는 장난감!”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이 장난감의 핵심은 단순했다.
그릴 수 있다. 그리고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쉽게는 안 된다.

왼쪽 다이얼을 돌리면 선이 옆으로,
오른쪽을 돌리면 위아래로 움직인다.
둘을 동시에 돌리면 대각선이 나오긴 하는데,
대각선이 아니라 다리 삐끗한 스파이더맨이 되기 일쑤였다.


“오늘은 강아지를 그려볼까?”


의욕 넘치게 시작하지만,
다이얼을 몇 번 돌린 순간 모든 건 무너진다.

귀는 눈으로, 코는 옆구리로, 꼬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외쳤다.


“됐다. 흔들자.”


그때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양손에 장난감을 들고,

앞뒤로!
좌우로!
살짝 흔들면 안 된다.
그림의 기억이 남는다.

흔들어야 한다.
진심으로, 온몸으로,
팔이 뻐근할 때까지 흔들어야 완전한 초기화가 가능하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세상에 흔들어야 사라지는 일도 있다는 걸.

그 이후로는 뭐든 흔들었다.
안 예쁘면 흔들고,
실수하면 흔들고,
그냥 기분이 안 좋아도 흔들었다.

가끔은 아무것도 안 그린 상태에서 흔들고 있었다.


“왜 흔드냐고?”
“그냥… 뭔가 어색하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장난감은 나에게 너무 많은 걸 알려줬다.

완벽한 선은 없다는 것.
실수는 되돌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흔들면 전완근이 생긴다는 걸.
하지만—
자꾸 흔들다 보면, 애초에 뭘 그리고 있었는지도 잊게 된다는 것.


어른이 된 지금,
화면은 더 커졌고, 도구는 더 정교해졌지만
마음속 어딘가엔 아직도
빨간 테두리의 그 장난감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가끔 일이 꼬이거나, 말이 어긋나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흔들면… 괜찮아지려나?”


그러다 옆에 있던 컵을 흔들고
커피를 흘린다.


흔들었더니 인생이 아니라

셔츠에 얼룩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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