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 번호는 1001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반 친구들 몇 명이서 미팅을 하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이자 마지막 미팅이었다.
장소는 햄버거집.
지금처럼 프랜차이즈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그 동네에서 제일 깔끔하다는 가게를 골랐다.
다들 머리에 젤 좀 바르고,
단정한 셔츠에 어른 흉내 낸 시계를 차고 나왔다.
그땐 그렇게만 해도 다 큰 줄 알았다.
맞은편엔 근처 여고 친구들이 앉아 있었다.
처음엔 다들 어색해서 콜라만 빨았다.
괜히 친구한테 장난치고,
말 놓을 타이밍만 재다가 결국은 웃긴 얘기 하나 던지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분위기가 풀려갔다.
그중 한 명이 자꾸 신경 쓰였다.
말이 많지도, 유난히 튀지도 않았지만
가끔 웃을 때 눈을 찡그리는 모습이 오래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그 애에게만 자꾸 말을 붙이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친구가 슬쩍 내 옆구리를 찔렀다.
“야, 번호 줘야지.”
우린 핸드폰이 없던 시절을 살았고,
그때 우리가 가진 건 삐삐 번호뿐이었다.
나는 종이 한 장을 찢어
내 번호를 적어 건넸다.
그 아래 작게 1001이라고 적었다.
그 숫자가 ‘보고 싶다’는 뜻이란 걸 어디선가 들었는데,
사실 정말 그런 의미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애가 그 숫자의 뜻을 몰라도 괜찮았다.
그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그저 조심스럽게, 숫자에 묻어본 거였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삐삐를 확인했다.
호출음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고,
공중전화 앞에 서면 괜히 주머니 속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 번호로 호출이 온 적은 없었다.
그 애는 아마
나처럼 쑥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그날이 별로였던 걸 수도 있고.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지만,
그땐 꽤 진지하게 기다렸던 것 같다.
나는 그때,
그 종이 조각을 오래 간직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가방 맨 안쪽 주머니에 접어 넣은 채로.
지금 생각하면,
그건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조심스럽게 좋아했던 그 마음만은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점심 햇살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