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동해, 키트

그 시절엔 말하는 차를 꿈꿨고, 지금은 침묵하는 내 차에 말을 건다.

by 기억상자

“마이클, 출동하세요.”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뛰던 시절이 있었다.

검은 차체에 붉은 불빛이 좌우로 번쩍이던 그 차,
말을 걸면 대답을 하고, 위험하면 보호막을 치며,
운전하지 않아도 알아서 와주던 그 이름, 키트(KITT).


다들 페라리, 포르쉐를 드림카라 했지만,
내게 드림카는 언제나 키트였다.
멋진 엔진 소리나 스포티한 디자인 때문이 아니라—
말이 통하는 차, 내 편이 되어주는 차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건,


마이클이 손목시계에 대고 말을 걸던 장면이다.
“키트, 지금 위치로 와줘.”
그러면 몇 초 지나지 않아 어딘가에서 엔진 소리가 들리고,
붉은 불빛이 번쩍이며 키트가 나타났다.
정말, 그때는 차에 친구가 있는 줄 알았다.


요즘은 스마트워치로도 음성명령을 할 수 있지만,
그건 그냥 날씨나 묻고 알람이나 끄는 용도다.
진짜 중요한 순간엔 아무 말도 못 알아듣는다.

“출동해, 키트.”라고 말해보면
손목에서 “죄송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가 돌아올 뿐이다.
그럴 땐 괜히 시계를 한번 쳐다보다가,
다시 말 없이 차까지 걸어간다.

그 시절의 시계는 상상이었지만,
지금보다 말이 더 잘 통했다.


학교에서 혼나고 나온 날도,
도망치듯 뛰쳐나오던 학원 계단 위에서도
언제나 상상 속엔 키트가 서 있었다.
작은 붉은 불빛이 번쩍이며,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주는 장면.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이젠 나도 내 차를 몰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주차장에 들어선다.

가끔 야근하고 나온 밤길,
어두운 골목에 멀리 세워진 내 차를 보면
왠지 그때 그 키트가 생각난다.


물론 말도 안 걸고, 불빛도 번쩍이지 않지만—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은
그 시절 내가 상상하던 키트랑 어딘가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출동해, 키트.”


물론 내 차는 미동도 없다.
대답도, 점프도, 자율주행도 없다.

창문에는 새똥이 묻어 있고,
타이어 공기압은 늘 ‘점검 필요’다.


그래도 말이다—
키트는 없지만, 그래도 내 차는 나를 기다려줬다.
비록 오늘도 문은 손으로 열어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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