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MB의 모험

손글씨로 적은 나만의 타이틀

by 기억상자

컴퓨터 책상 서랍 안, 회색 플라스틱 케이스.


그 안엔 네모난 디스켓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라벨에는 매직으로 온 마음을 다해 적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글씨체는 뭔가 굉장히 ‘진지한 장르물’ 같았고,
‘고인돌’이라는 세 글자에는 거의 중학생 수준의 붓글씨 혼이 들어가 있었다.
일부는 또박또박, 일부는 굴림체 흉내.


그땐 그 라벨 하나하나가 명함 같았다.
‘이 디스켓은 내가 가장 아끼는 게임이다’라는 뜻으로.

고인돌, 페르시아의 왕자, 게임모음 1, 중요...

그중 ‘중요’는 절대 중요한 적 없었다.


가장 자주 손에 쥐던 건 두 장.
도끼를 든 원시인이 맨발로 달리던 《고인돌》,
그리고 칼 하나에 의지해 던전을 헤매던 《페르시아의 왕자》.

플로피 디스크를 본체에 밀어 넣고,

컴퓨터가 윙— 하는 소리를 내면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아, 잘 들어갔다.”


그 안에서 뭔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설레었다.


‘고인돌’은 단순했다.
도끼 던지고 점프하고 도망치기.
그런데 이상하게,
한 번 기절하면 또 하고 싶어지고,
잡히면 분했지만
다시 달리면 신나던 게임이었다.

게임 오버 화면이 나올 때마다
진짜 공룡에게 쫓기는 것처럼
등이 땀에 젖곤 했다.


그리고 그 시절 나의 최애 게임..


PRINCE OF PERSIA


필기체로 떠오르는 그 한 줄만 봐도
괜히 자세를 고쳐 앉게 됐다.
그리고 내 안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시작되는 느낌.


아슬아슬한 점프,
칼날이 쓱 올라오는 바닥,
그리고 눈치 싸움처럼 펼쳐지는 검술.
몇 번이나 떨어지고, 찔리고,
다시 시작했다.

어설픈 조작으로 철창에 갇히면
괜히 화면을 탓하면서

“방금은 안 눌렸어…”라고 혼잣말을 했다.


아무도 없는데도 꼭 변명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건 게임에 진심이었단 증거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디스켓 한 장은
정확히 1.44메가바이트.
요즘 휴대폰 사진 한 장에도 못 미치는 용량이다.


그런데도 그 안에는
긴장감, 몰입, 흥분,
그리고 내가 만든 세상이 있었다.


게임을 켠다는 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그날 하루, 가장 재밌는 부분을 시작하는 일이었다.


한 장의 디스켓에,
한 시절의 내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요즘엔 ‘게임’이라고 하면
로그인, 업데이트, 동기화에
설치만 해도 수십 기가가 훌쩍 넘는다.
그 사이에도 팝업은 뜨고, 패치는 밀려오고,
시작하기까지 참 많은 단계를 거친다.


하지만 그 시절엔,
1.44메가바이트짜리 디스켓 한 장이면 충분했다.


설치도 없고, 로딩도 짧았고,
그저 디스켓을 넣고 Enter만 누르면—
세계가 ‘툭’ 하고 열렸다.


그 작은 디스켓 속에는

모험이 있었고,
긴장감도 있었고,
가끔은 혼잣말로 풀어야 했던 내 실수들도 있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회색 사각형이겠지만,
나에겐 그게
유년의 방 안에서 떠났던 최초의 여행 티켓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플로피 디스크.
더는 돌릴 수 없고, 다시 저장할 수도 없지만,
그 안엔 분명 나의 유년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검은 바탕 위로 깜빡이던 커서,
필기체로 뜨던 타이틀 화면,
그리고 방향키에 담긴 나만의 모험.
그 모든 것들은,
이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만 실행된다.


다시 열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의 내 모습과 감정은,

지금도 어딘가에

조용히 저장된 채 남아 있다.


가끔 마음 한켠에서, 불쑥 떠오를 만큼 선명하게.


이젠 더는 저장되지 않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늘 ‘읽기 전용’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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