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커피에 인생을 저어 넣던 시절

“믹스 하나 줄까?” 그 말이면 충분했던 날들이 있었다.

by 기억상자

요즘은 커피 하면
으레 “아아 하나요?”가 기본 주문이다.

사계절 내내 얼음을 씹는 시대.
쓴맛은 익숙하고,
진한 건 멋져 보이고,
따뜻한 커피를 시키면 가끔은 묻는다.


“진짜요?”


그런데 말이야,
라떼는 말이야,
믹스커피 하나면 만사불여튼튼 이었어.


노란 봉지 하나 툭 뜯고,
스테인리스 주전자의 김 나는 물을
종이컵에 딱 반만 붓고.

휘휘 저을 때면
그 순간만큼은 우리도 바리스타였다.


믹스커피는 손맛이었다.
특히 물맛.

한 컵이냐 반 컵이냐,
그건 단맛과 욕먹음 사이의 줄타기였고,
주전자의 기울임은
사람 관계만큼이나 미묘했다.


물을 너무 많이 부으면 “윽! 맛이 왜이래 밍밍해!”
너무 적게 부으면 “커피가 아니라 설탕죽이다!”

정답은 딱,
종이컵 절반 + 두 바퀴 반 저어주기.


이 공식이 무너지면,
그날 기분도 같이 무너졌다.

믹스커피 한 잔을 타는 일은
그냥 커피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를 위한
잠깐의 배려, 조용한 위로,
혹은 아주 소심한 고백이었다.


가끔은 말도 없이
종이컵을 슬쩍 밀어주고는
괜히 딴청을 피우기도 했지.


장소는 더 드라마틱했다.
사무실 구석 탕비실,
버스 터미널 한켠,
공부하다 몰래 빠져나간 학원 복도 끝.


그곳엔 늘
뜨거운 김과 노란 커피 향이 맴돌았고,


“나 도 한 잔만.”


이 한마디가
어색한 사이를 조금은 덜 어색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디저트 카페가 넘쳐나고,

커피도 이제 싱글 오리진이니 콜드브루니,

나이트로니 플랫화이트니 드립백이니,

취향 따라 구분이 복잡해졌지만—


그때는 그냥


"믹스 하나 줄까?"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요즘도 여전히 잘 팔리고 있는 믹스커피.
어딘가에선 지금 이 순간도
김 모락모락, 종이컵 위로 익숙한 향이 피어오르겠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 우리가 탔던 커피는
더 달았던 것 같고,
더 따뜻했던 것 같다.


그 시절 우리가 탔던 커피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섞여 있었던 것 같다.

아무 말 없이 종이컵을 건넸던 그 장면,

사람 냄새가 같이 섞여 있던 시절의 맛,
그 조용한 마음 표현이,

어쩌면 내 인생 첫 번째 커피 프레젠테이션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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