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아니라, 아이를 기억한다
중학교 때였다.
비 오는 날, 집에서 딩굴다가 심심해서 가까운 비디오 대여점에 갔다.
뭘 빌릴까 둘러보다가 눈에 띈 한 비디오테이프.
표지에는 어딘가 어두운 톤의 배경, 그리고 조그만 실루엣 하나.
제목은 태양의 제국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순간적으로 ‘야한 건가?’ 싶은 생각이 살짝 들었다.
그때만 해도 ‘제국’, ‘태양’ 이런 단어가 붙으면 어쩐지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뉘앙스가 있었달까.
게다가 괜히 ‘태양’ 하면 일본 제국주의가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일본 하면 그러니깐… 흠흠…)
그런 이름의 영화가 비디오 대여점 한편에 조용히 꽂혀 있는 걸 보자,
왠지 알아서는 안 될 걸 알게 될 것 같은 기대감이 살짝 스쳤다.
결국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테이프를 빌려 집에 와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 속 작은 소년 하나가 내 안에 남았다.
그의 두 눈, 두려움, 그리고 낯선 세상을 바라보는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영화를 열 번 넘게 다시 보게 됐다.
왜였을까.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영화는 전쟁을 다룬 이야기였다.
하지만 전쟁을 겪는 건 탱크도, 장군도 아닌 한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이름이 짐.
상하이에서 유복하게 살던 영국인 아이였지만,
전쟁이 터지며 모든 걸 잃고,
혼자 남겨진 채 포로수용소로 끌려간다.
그가 울고, 배고프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어떤 장대한 서사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아팠다.
그곳엔 히어로도 없었고, 정의도 없었다.
짐은 그저 살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끝내 그렇게 살아냈다.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 세상에서, 그 아이는 스스로를 챙겨가며 버텨냈다.
나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너무 인상 깊었다.
왜 감동받았는지, 지금도 딱 잘라 말하진 못한다.
그저… 그 애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특히 한 장면이 기억난다.
카미카제 출격을 앞둔 일본 전투기 조종사들
짐은 그들을 보며 먼발치에서 경례를 올린다.
경계와 적대의 구분이 사라지는 순간.
소년은 전쟁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경외심을 품었다.
그 순간, 총성도 국가도 아닌, 사람의 각오와 침묵이 보였기 때문일까...
지금도 뉴스를 보다 보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안에도, 분명 짐처럼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뉴스 속 전쟁엔 늘 아이들이 있었다.
짐처럼, 아무 말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동자들.
그들이 겪는 하루는 영화와 닮았지만,
훨씬 더 잔인하고, 훨씬 더 현실이다.
어쩌면 나는,
태양의 제국이라는 영화를 열 번이나 본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짐의 시선, 짐의 감정, 짐의 생존을
내 마음 한편에 품고 지내왔는지도 모르겠다.
소년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전쟁을 마주했고,
나는 그 소년의 눈을 빌려 세상을 처음 들여다보았다.
어른들의 전쟁은 차갑고 무겁지만,
아이의 전쟁은 외롭고 슬펐다.
그 마음 하나가, 시간 속을 조용히 걸어와
지금도 내 안에서 오래도록 잔향처럼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