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한 통의 무게는 기억의 두께였다

번호를 외우던 시절, 사람도 더 오래 기억했다

by 기억상자

요즘은 사람 하나 찾는 일이 참 간단하다.
이름만 검색해도 전화번호에, 지도에, 가게 리뷰까지 줄줄이 나온다.

하지만 그 시절엔 번호 하나를 찾으려면
먼저 책장을 열고, 허리를 숙이고, 손목을 풀어야 했다.


그 책.
노란 표지에 두께는 3센티,
무게는 거의 3킬로쯤 되었을 것 같은 전화번호부.


팔 운동은 덤이었고,
책상 위에 펼쳐 놓는 순간 책상이 반쯤 작아지는 마법이 일어났다.
‘이걸 왜 이렇게까지 두껍게 만들었을까’ 싶으면서도,
막상 없으면 허전한, 가구 겸 문서함 같은 존재감.


게다가 그 묵직한 전화번호부는
번호를 찾는 용도보다 다른 용도로 더 많이 쓰였다.


우리 집에선 신문 날아가지 말라고 눌러놓거나,
TV 위에 안테나 각도 조절 받침대로 올려두기도 했다.
한 번은 균형이 심하게 안 맞는 책상 밑에 끼워뒀는데,

그땐 무게보다도 ‘딱 맞는 두께’가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책상은 안 흔들렸지만, 전화는 못 걸었다.


전화번호부는 그 자체로 생활 도구였다.
가정용 공구, 간이 받침대, 바람막이,
그리고 조용한 오후엔, 별다른 이유 없이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책.


번호를 찾다 보면
‘정육점’과 ‘가발관’ 사이에 웬 ‘다방’이 끼어 있고,
그 아래에 ‘○○전파사’가 이름도 없이 ‘○○씨’로 등록되어 있는 걸 보면
왠지 동네 한 바퀴를 다 돈 느낌이었다.


엄마는 그 전화번호 옆에 자신만의 암호를 만들어 두셨다.
○표는 “여긴 친절해”,
△는 “다신 안 간다”,
☆는 “한 번 가봤는데 꽤 괜찮았어”.
종이에 남긴 엄마의 리뷰는
지금의 별점보다 훨씬 신뢰도가 높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배달앱에서 별이 많으면 의심도 없이 ‘바로 주문’을 누른다.
아마 내 안 어딘가엔
별표를 정성스럽게 그려 넣던 엄마의 손길이 아직도 살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제는 전화 한 통이
손가락 몇 번이면 닿는 시대다.
가볍고 빠르지만,
때로는 그게 너무 가볍고,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그 시절엔,
무게 3킬로에 두께 3센티쯤 되는 책을 넘겨야
비로소 사람 하나에게 닿을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사람을 천천히 찾았고, 오래 기억했다.


지금은 가족 외에
친구, 직장 동료, 지인 전화번호까지
모두 손가락 하나로 꺼내는 시대다.
외울 일도, 기억할 틈도 없이
그저 검색하고, 저장하고, 지운다.


그래서일까.
천천히 찾고 오래 기억하던 그 방식이,
지금은 더 이상 내 안에 없다는 게 가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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