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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응지음이지영 Dec 10. 2020

다시 너의 눈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5)

친정엄마, 그녀가 돌아왔다



동생이 아기를 낳았다. 면회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정엄마와 나, 그리고 우리 아기 햇님이는 서둘러 동생과 조카가 있는 산후조리원으로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엄마는 동생이 무사하게 출산하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도하셨기에, 동생의 빠른 회복 또한 간절히 바라셨다. 로비에 도착해 잠시 대기하는 동안 엄마는 조카가 태어나는 장면이 찍힌 동영상을 보고는 '못생겼다'는 덕담(?)을 하시며 한참을 웃으셨다.



하지만 이내 제왕절개로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엄마는 많이 아쉬워하셨다. 기분이 언짢았다.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를 선택하는 이유는 의사가 산모에게 위험부담이 클 경우 제왕절개를 제안하기 때문일 텐데. 나 역시도 그랬고 말이다. 중요한 문제를 틀린 시험지를 채점받은 기분이었다. 아니,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을 어쩌란 말인지?



잊고 있었다. 옛날과는 많은 것이 달라진 세상을 사는 우리를, 엄마는 늘 엄마 기준의 완성형으로 돌려놓고 싶어 하셨다는 걸. 어쩐지 이상했더랬다. 결혼으로 인한 독립 후 아빠의 투병이 끝날 때까지는 사이좋은 모녀처럼 별 갈등 없이(?) 지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관계의 불편함이 다시 시작된 것 같다. 왜 일까? 엄마는 아빠의 투병과 장례식 이후, 아빠의 문제에서 자녀의 문제로 엄마의 시선이 다시 이동했을 뿐이라는 걸, 나는 깨달았다.



내 감정은 그렇다 치고, 이 말이 동생 귀에도 들어갈까 염려가 됐다. 동생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혹시라도 그 말 동생에게는 절대 하지 말아요, 절대."

"왜?"

"그런 말을 하면 동생은 어쩌라고? 이미 낳았는데!"

"아니, 뭐가 어때서? 그냥 말하는 건데~?"

"그래도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섭섭한 말을 하면 안 되지~!"

"섭섭하긴 뭐가 섭섭해? 그냥 그렇다는 건데!"



누가 뭐라 해도 늘 스스로가 옳고 바른 길을 간다 생각하시는 엄마께 더 이상 해드릴 말이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생후 14개월 된 햇님이가 나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꼬물거리는 게 느껴졌다.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대화를 그만두었다.



역시나 엄마는 동생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니, 내가 이런 말을 했더니 네 언니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니? 가만 듣고 있자니 또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무리 그래도 갓 낳은 산모인데, 그냥 오늘만큼은 수고했다 하고 축복만 해주면 안 되는 걸까. 출산 직후가 산후우울증을 제일 조심해야 하는 때인데 말이다. 혹여나 걱정이 됐던 나는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뭐가?"

"아니, 엄마가 저런 말씀 하시는 거."

 "응, 난 괜찮은데? 언니가 안 괜찮은 거겠지~"

"이게 괜찮다고? 안 섭섭하다고? 어떻게?"



맘 카페에서 누군가 출산 직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며 게시글을 올렸다면 그걸 읽고 흥분하지 않을 아기 엄마들이 있을까 싶은데, 동생은 그저 엄마를 이해했다. 산모로서의 위험을 무시한 게 아니라, 그저 자연분만이 아닌 것이 아쉬우신 거라며 넘겼다. 엄마와 대면하면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갈등 상황에서, 동생은 나와 달리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편이었다. 나보다 더 성숙한 듯 느껴지는 동생의 멘털이 부러우면서도 이해가 안 됐다. 아마도 당사자보다 더 화가 나 있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말 한마디를 들어도 너는 왜 다를까? 나는 왜 너와 다를까?



나는 왜 엄마에게 채점된 시험지를 받는 기분이었을까. 울컥하며 '어쩌라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나, 왜 난 '어쩌고' 싶었을까. 이미 아이를 낳고 14개월째 육아 중인데, 뱃속으로 넣었다 다시 낳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당연하다. 그건 나의 멘털을 흔든 그분도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니까 뭘 어쩌라는 건지?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왜 난 '어쩌라고 하는지'의 답을 찾으려고 할까? 오답을 정정하기 위해? 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생각해보니 이건 자연분만과 제왕절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살림이든 요리든 양육관이든, 엄마의 시선 앞에서는 내 모든 선택의 결과가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잘 보이기 위해 신경 쓰고 인정 못 받을 거면 드러내지 않았다. 행여나 나를 평가하시는 게 두려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만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고는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있어왔던 나의 수다스러움을 엄마는 즐거워하셨지만, 그래서 엄마를 만날 때마다 왠지 모를 부담이 드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채점된 시험지, 늘어나는 잔소리.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피곤하게 했던 나의 방어적인 태도, 억지로 짜내는 수다스러움. 그런데 왜 난 '굳이'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일까? 결혼도 하고 독립하고 아이도 낳았고 무엇보다 같이 안 살잖아? 왜 인정을 받아? 못하면 뭐가 어때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단번에 수긍하게 되었다. 나는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다. 처음엔 이것이 엄마가 나를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것 또한 이해가 됐다. 그런 갈등의 순간들이 올 때마다 내가 했던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내 모습을 이룬 것이었다. 첫 번째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선택들에 대한 '인정'을 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그건 오로지 내 선택이었다. 엄마 탓이 아니었다. 엄마와 나는 둘 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서로가 내 생각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면, 들어주기는 커녕 자기주장만 내세웠겠지.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틀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다름은 헐뜯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틀린 사람이 되진 않는다. 나의 다름은 내가 인정하면 그만이다. 햇님이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틀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외할머니 앞에서 안간힘을 쓰는 엄마의 모습보다 좀 더 다른 엄마 내면의 힘을 보여주고 싶어 졌다.


엄마의 생각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당연한 거지만 다시 우리를 걱정하고 신경을 쓰시는 것도 반기기로 했다. 그동안 아빠 문제로 몸도 마음도 지친 것들이 조금은 회복된 것은 아닐까,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서로 육아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도, '인정'하기로 했다. 이 다짐도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른다. 다만 자주 다짐하면 그만큼 오래 지속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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