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누 두 개 넣고 쓰는 글

산책 시 가상 재난코드가 발효될 때

by 게으른 산책가

2021. 11. 05


카누 미니를 두 개 넣고 설탕 한 스푼, 그 맛을 알아 버렸다. 산책 전에 마시면 더 또렷한 정신으로 산책길을 음미하니, 운동선수들의 약물 복용과 같은 효과가 아닐까. 다행히 밤에도 잘 잔다. 모두 가을볕 덕분!


우리 동네 어른들은 젊은이(사십 대는 젊은이) 대해서 관심 없다(그게 너무 좋아). ‘노인 일자리’로 출근하신 어르신들이 그늘에 모여 앉아계시길래 누군가는 나를 보겠지 싶어서 고개를 돌려 시선 맞춤 없이 인사를 했다. 하지만 아무도 끄덕이는 분이 없다. 결론은 본인들 이야기하느라 나를 보는 분이 아무도 없다는 것. 옆 동네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찬가지 이유로 모이신 어르신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바라만 보겠는가, 간섭도 하시지. 그런 이유로 우리 동네 어른들이 더 좋다.


바람 따라 잎이 떨어지길래 확대해서 사진을 찍었다. 나만 알아보는 나뭇잎, 더 찬란한 낙엽식이 벌어지더라도 사진은 찍지 않기로 했다. 핸드폰 공간 낭비니깐.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추월해서 달려온다. 오르막길이라 속도를 내니 ‘우웅’ 소리가 무섭게 난다. 이러면 내가 생각한 가상 재난코드가 있다. 실수로 내게 달려온다면 가드레일 밖으로 뛰어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조심해야 한다. 며칠 전 지인과 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지인도 이런 가상 재난코드를 생각하며 걷는다는 말에 크게 웃다가 실제 일어난 이야기를 해줬다.


“내가 걷는 길에 진돗개 한 마리가 있다고 했잖아. 가끔 개가 풀리면 좀 무섭게 다가오거든. 그러면 개 주인을 불러야 해. 그럼 얼른 가버리거든. 근데 어떤 아주머니가 그런 걸 모르고 개가 무서워서 가드레일 밖으로 뛰쳐나가다가 키가 작으셔서 가랑이가 가드레일에 딱 낀 거야. 얼마나 아프겠어. 그래서 개 주인에게 화를 내며, 이 놈의 개** 죽여버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더라고.”


그래서 가상 재난코드에 한 가지를 첨가했다. 도움닫기 하고서 뛰어오르기로.


다행히 실행에 옮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리막길을 걷는 동안 화장실 생각이 났다. 이럴 때 가상 재난코드가 발효될 수 있다. 첫 번째는 화장실 있는 관공서를 찾는 것(너무 멀었다)이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는 일이다(너무 환했다). 하아, 그러기엔 내 옷도 문제다. 일주일 내내 상하 분홍 운동복을 입었으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냥 딴생각을 해야 한다. 그건 뭐 내 전공이지. 딴생각만 하고 사는 사람이니까.


초록잎과 자주꽃은 그나마 어울리더니 붉은 잎과 자주꽃은 촌스럽다. 몸뻬 바지에나 들어갈 법한 패턴이다. 몸뻬바지가 세련되면 안 된다. 촌스러워야 탐나니까. 몸뻬 디자이너님, 이 패턴 사 가요.


그리고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가을날은 봄날의 반짝이는 아기 잎도 없으며,

가을날은 여름날의 동화 같은 하늘도 없으니까?


아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화장실 생각만 나서다. 무지 급했다. 집이 보이는 순간부터 뛰었다. 화장실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마라톤 골인 지점처럼 난 더 속력을 내었고, 지금은 평화를 만끽하고 있다.


아주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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