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지만 슬프지 않아
우선 책을 덮었다. 책을 뒤적거릴 생각은 없다. 여운이 남았기 때문이다. 책의 여러 문구를 올리다한들, 예비 독자로 하여금 문구가 읽힐 가능성은 낮다는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 있다(아직도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듯 착각하고 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저자의 남편, 피터팬 씨의 팬이 되었다. 방문 수업을 가다 보면 등이 우중충한 집이 있다. 평수는 크고 현관부터 으리으리하지만, 칙칙한 분위기는 어두운 조명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피터팬 씨는 노란빛을 가진 조명등 같다.
나는 어렸을 때, 아빠의 일상이 노란 등이기도 하고 검푸른 등이기도 했다. 부지런히 장화 신고 들어오는 아빠의 건강한 걸음걸이는 노란 등이며, 입에 화를 달고 불규칙한 걸음걸이로 귀가하는 날의 아빠는 검푸른 등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피터팬 씨는 노란 등이다. 세상의 사물과 계절의 변화를 더 이상 시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그는 밝은 대낮의 산책마저 아내와 손잡고 나서야 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를 생각하는 초긍정주의 남자다.
하지만 답답할 정도로 얽어진 인생의 실타래에서 저자는 남편의 ‘초’ 긍정에 박수를 칠 수 없었다. 한 줄기 빛도 들어서지 않는 차가운 우물 밑바닥에서 언젠가 내려올 두레박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축축한 옷에 쉬이 서리는 냉기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참아내느라 몸은 ‘자율신경 실조증’이라는, 티 나지 않는 병명을 갖게 됐다. 더 이상 그녀는 정해진 일만큼 꼭 해내야만 하는, 사회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직업을 포기해야 했다.
부부는 모든 빚을 갚았다. 그건 제로를 의미한다. 누군가에겐 다시 시작하면 되는 의미의 ‘제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부의 제로는 언제든 ‘마이너스’로 갈 수 있는 위험한 숫자다. 그들은 우아한 빈자의 삶을 선택했다. 자신들이 가진 한도 내에서 즐길 줄 알며, 고요한 우아를 갖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울컥했으나 결국은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해탈한 수도승과 마주한 것도 같다. 자신에게 불필요한 감정이나 관계들은 체에 걸러 낸 저자에게서 맑은 향기가 느껴진다.
슬프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묘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