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잠이 깬 어느 날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난 리모컨을 찾는다. 언젠가부터 이런 습관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티브이를 향해 모로 누워서 채널 ‘+’를 누르기 시작한다. 처음 위치로 오는데 인내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빠르게 화면은 움직였다. 조금 시청하다가 이내 잠이 들려고 할 때, 전원 버튼을 누를 계획이다.
음량은 실수로 새벽까지 켜두어도 수면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설정했다. 숫자가 큰 채널에서는 ‘전원일기’가 아직도 방영하고 있다. 묵은 가족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드라마의 스토리를 보는 게 아니라, 배우들의 표정을, 목소리를, 움직임을 감상하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나와 함께 드라마를 봤을 엄마가, 아빠가, 할머니가 떠오르고 만다.
밤 여덟 시에 방영했던 프로그램이던가? 그럼 아빠는 코를 골고 자던지, 드라마 속 갈등에 대해서 뻔한 내용이라며 든든한 가장답게 모범 답안을 내놓았겠지. 그러면 한껏 드라마에 몰입했던 할머니와 엄마는 든든한 가장을 노려보는 상상을 하니 웃음이 난다. 덥수룩한 머리의 아빠가, 두피 가까이까지 말아진 파마머리의 엄마가,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은 할머니가 자꾸만 떠오른다. 잠시 멈춘 리모컨을 다시 눌러본다. 신파의 밤은 싫으니까.
근황 소식이 없던 연예인이 종편 방송에 나와서 자신의 과오를 구구절절 말하니, 패널들은 고개를 주억거려 준다. 연예인들은 좋겠군. 이미 법에 의해 제단 되고 마름질까지 끝난 비연예인은 팔리지 않은 옷의 가격표에 더 낮은 가격이 매겨진 상품처럼 감가상각 인생을 살게 되는데, 눈물 몇 방울로 희석되는 그들의 주홍 글씨는 새기는 게 아니라, 수성 사인펜으로 스치듯 닿은 것이다.
이제 ‘공정과 상식’이라는 말 자체도 누군가에 의해 부정어가 되었다. 힘이 있는 자는 조각가처럼 살 수 있다. 빛이 닿는 부분은 더 입체적으로 빛나도록 정이 나선다. 사포질로 매끄럽게 문대주면 조각당한 실체가 무엇인들 알려하지 않지. 관객들은 멋진 작품에 환호할 뿐이다. (같은 기사 내용이라도 어떤 언론사를 거치는 것에 따라 악의 축이 되기도 하고,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단해.) 악어의 눈물은 이제 지겹다. (시선을 분산하기 좋은) 기하학무늬가 새겨진 포장지로 감춘 위선에는 화가 난다. 더 화가 나기 전에 리모컨을 눌러본다. 꿈속에서 그들을 만날까 무섭다. 그럼 내가 힘 있는 자로 캐스팅되길. 눈에 장착한 눈물을 스포이드로 다 빼내버릴 테다. 포장지는 다 찢어내니, 속살을 드러낼 지어다.
어허, 내가 좋아하는 기안 84가 나왔다. 웃으며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는 인간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지저분하고 기이한 생활 방식에 결혼은 힘들겠지만, 덕분에 ‘너’ 혼자 살아가는 모습을 중년 장년 노년까지 보게 될 것만 같다. 팬으로서 그러지는 않길 바란다. 분명 그럼에도 그를 사랑할 그녀가 있을 것이다. 솔직하고 뜨뜻한(따뜻과는 다른) 그를, 한방의 큐피드 화살을 맞고 오로지 사랑이라는 아편으로 그에게 중독된 그녀가 꼭! 나타날 거라고 믿는다. 재방, 삼방, 사방... 내게는 다른 이에게 큐피드 화살이 꽂힌 지라, 몇 번을 본 방송은 지겹다. 희민, 금요일에 만나. 이제 원 위치가 되는데, 얼마 남지 않았다. 리모컨을 눌러본다.
어라, 오늘의 날씨가 나오네? 자정을 넘기고 말았군. 또랑또랑한 자정의 기상 캐스터라니. 잠이 확 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