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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산책가 Jul 27. 2023

여름 안에는 단내 쓴내 쉰내 다 있다


바다를 시원하게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배를 본 적이 있는가? 갈라지는 물길이 높을수록 덩달아 선장의 자신감도 드높아 보인다.


좁은 농로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자전거 뒤에 자신보다 무거운 사람을 실었는지 자전거 앞머리는 우물쭈물해졌다. 그러다가 저만치 전봇대라도 만난다면 우물쭈물 횟수는 잦아지다가 결국 양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거친 자갈 위에서 '끽' 소리와 함께 멈춰버리면 '나'는 말 한마디 못하는 벙어리 바위처럼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내게 어디로 가는지 묻지 마라. 그러면 눈을 질끈 감을지도 모르니깐. 돌아보면 내 인생은 시원스레 바닷물을 가르며 항해할 자신이 없었다. 자갈이 박힌 길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내 인생. 주변을 살펴볼 수도 없다. 자칫하면 돌에 걸려 넘어질 테니까.


절 옆에 조금 멀리 외딴집이 우리 집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그곳에 가려면 귀가 시간은 뻔하다. 산등성이에 해가 걸쳐있을 때, 그때가 집에 갈 시간이다. 엄마는 내가 겁이 많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니, 내 생일은 알고 있을까? 노는 게 좋아서 해 떨어지기 직전까지 놀다가 집에 들어갔고, 어느 날은 그림자밟기를 한다며 늦게 귀가하는 날도 있었다. 사실, 굉장한 겁쟁이인데 엄마는 한 번도 집 앞에서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날은 엄마나 아빠, 둘 중에 한 분이 내게 알려줬고 또 그들이 나를 낳았으니 알고 있을 텐데, 모내기로 바쁘다며, 아니 변명도 하지 않았지.


그 흔한 미역국이란 걸 먹어본 기억이 없다.


내가 말이 트인 것도 신기할 노릇이다. 엄마가 그토록 말이 없는데, 갓 태어난 난 누구에게 말을 배웠을까. 엄마는 '대단한' 책임감으로 인생을 살아냈다. 먹고사는 책임감에 9할은 걸었을 것이다. 나머지 1할은 자식들이 하는 말 들어주기, 그냥 들어주기다. 한쪽만 말해야 하는 무전기처럼. 나는 엄마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내 말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뿐. 텅 빈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사월에 갔던 남원 애기봉은 진달래가 피기 직전이었다. 진달래가 필 때쯤 또 가야지 했는데 유월이 되어야 애기봉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새벽부터 나선 등산이었다. 이른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원 시민들은 지리산보다 이곳을 더 사랑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애기봉이다. 계단을 올라 숨이 차오를 때쯤 '거북바위'가 있었다. 바위에는 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백제 시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병, 장수, 건강, 치유 등의 기원'


거북 형상이라서 고깟 바위에 마음을 주고 귀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거북 바위를 보면 떠오른다. 오래 살라고 새겨진 글귀를 보면 떠오른다.


추석이 다가올 때쯤이었다. 그날은 강정을 만들기 위해서 엿물을 끓이고 있었다. 곤로에서 펄펄 끓던 엿물을 엄마는 긴 나무 주걱으로 저어줬다. 명절을 앞두고 분주한 집안 분위기는 어린 나를 설레게 했다. 맛있는 것을 준비하고 나면 장날에 나를 데리고 가서 새 옷을 사줄 수도 있다. 명절을 앞두고 엄마가 뜨거운 불 언저리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는 설렐 일이다.


"으아아아아, 뜨거워."


설레던 내 심장이 잔뜩 졸아들었다. 엄마는 그토록 말도 없고 불평도 없는 사람인데 태어나서 처음 듣는 비명이었다. 엿물을 끓이던 솥이 뒤집혀서 엄마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그 후 기억은 없다. 난 그때부터 강력한 지우개를 사용했나 보다. 여전히 예뻤던 이십 대 후반의 엄마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화상 때문에 엄마 표정은 더 단순해졌다. 여전히 불평도 없고 화를 모르는 엄마. 그 엄마가 떠오른다.


거북바위는 장소를 옮기거나 훼손해서는 절대 안 되며, 잘 보존되길 바란다고 푯말에 쓰여있다.


엄마는 내게 알려준 게 너무 없다. 열여섯 살에 첫 생리를 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속옷을 갖춰 입는 방법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고작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별이 되고 말았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도 그저 거북바위처럼 곁에 있어주지.


애기봉을 오르면 거북바위가 반긴다. 말 못 하는 벙어리 바위 앞에서 무심코 떠오르는 엄마의 기억이 화상처럼 짙어진다.


엄마는 초여름날 별이 되었다. 유월 오늘, 심하게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2021. 쏟아질 듯한 여름 별이 가득한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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