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은 시원한 푸른빛으로 채워졌다. (초록색) 대문, (주황색) 지붕, (회색) 전봇대는 습자지를 처음 써본 여덟 살의 그림처럼 실루엣만 남았다. 실루엣 안으로 검은색이 채워질 때쯤 도시의 가로등은 일제히 켜졌다. 푸르스름한 골목길마다 꽃다발만 한 불빛이 들어섰다. 붉은 장미 꽃다발만 한 불빛은 푸른빛에 스며들지 못하다가, 푸른빛이 칠흑이 될 때, 드디어 골목은 감빛으로 채워지고 말았다.
늦가을로 들어선 11월, 유난한 바람이 불어댄다. 신록과 유연을 잃고 뻣뻣해진 담갈색 플라타너스 잎은 낙엽이 될 기로에서 위태롭게 떨고 있다. 결국 유난한 바람과 함께 감빛 아래로 떨어진 플라타너스가 그녀의 어깨를 툭 스치며 땅으로 떨어진다. 그녀는 멍 때리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게가 있는 잎의 활공에 연연하는 45세 그녀, 생물이라곤 전무한 그녀의 빈집에 익숙한 탓이다. 그녀는 회사를 벗어나면 점점 생물과의 접촉이 줄어든다. ‘반려’가 붙은 어느 것도 없는 그녀의 공간으로 향할 때, 편안함을 느낀다. 플라타너스 나무를 올려다본다. 감빛 가로등만 한 플라타너스 나무 가지는 오로지 도시의 필요조건에 맞춰 잘려있다.
허하나의 본가는 회사와 가까운 곳에 있으나, 그녀는 세 정거장을 거쳐야 하는 곳으로 독립한 지 5년째가 됐다. 마흔 살은 마치 과속 딱지와도 같았다. 벌금뿐만 아니라 벌점도 붙게 되는 과속 딱지처럼 부모님은 만 39살이 위태롭게 느껴진 모양이다. ‘길조심 해라.’라고 어린 하나를 잔소리하던 엄마는 이제 주말에 집에 붙어있는 하나를 못 견뎌했다.
“좀 사람도 만나야 결혼하는 건데, 넌 어째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거니?”
그래서 그녀는 과태료를 물고서 과속 딱지를 내기로 결정했다. 벌점 같은 잔소리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독립이라면 세 정거장의 출퇴근이 대수겠는가. 그녀의 부모는 45세가 된 하나에게 더 이상 채근은 없었다. 아빠가 먹는 한약을 나눔 받는 나이가 된 것이다.
“하나야, 어디니?”
“버스 안이에요. 무슨 일 있으세요?”
“엄마가 홈쇼핑에서 내복을 여러 장 샀거든. 너도 두어 장 줄게. 색 골라 봐 봐. 연분홍, 진분홍, 연주홍...”
“엄마 입으세요, 전 제가 알아서 살게요.”
“얘, 얘, 환절기라 잘 입어야지. 감기 든다니까? 프로폴리스 신제품이 나왔......”
하나는 휴대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 엄마는 매번 최신 버전의 잔소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버스 창 너머로 플라타너스 나무가 휙휙 지나간다. 도시 편의에 따라 나무 가지들은 잘려있다. 매운 양파를 먹은 것처럼 하나의 마음이 아리다. 생채기에 마늘 즙을 떨어뜨린 것처럼 쓰라리다.
김경숙은 은행원이었다. 잘 다려진 유니폼에, 아나운서 못지않게 단정한 머리 스타일 그리고 구두까지 신고서 현관 앞 전신거울에 서서 턱을 당겨본다. ㅇㅇ은행을 상징하는 유니폼은 비싼 정장을 입었을 때보다도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던 시절이었다. 다만, 그녀가 걸어서 출퇴근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건망증이 심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너무 낙천적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김경숙은 마감업무 때마다 시재가 맞지 않았다. 점점 이 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시재가 맞지 않을 때마다 주판 위에 있는 손은 더욱 떨게 되는데, 단정한 머리는 점점 헝클어져갔다. 출근할 때 내던 경쾌한 구둣발 소리는 퇴근할 때는 물먹은 솜 짊어진 소리를 냈다. 집 근처 벤치에 잠시 앉았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구두에, 포갠 손등에, 어깨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확 시집이나 가 버릴까?’
그녀는 결혼을 한다면 가계부도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깨가 축 처진 그녀를 멀리서 걸어오는 그가 반하고 만다. 축 처진 그녀를 알 리 없는 그는 그녀가 조신한 요조숙녀로 보였다. 그 뒤로도 경숙은 시재가 매번 틀렸으며, 집 근처 가로등 아래 벤치에서 축 처진 모습으로 앉아있었고, 그는 의도적으로 같은 시간에 그녀 집 근처를 오게 되니, 그야말로 짝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는 사랑에 빠질 누군가에게 당부하고 싶었다. 에로스의 화살에 맞기 전에 주의할 점이 있으니, 가로등 아래 어깨가 축 처진 여자를 조심하라고 말이다. 드디어 경숙은 은행을 때려치웠고, 눈코입 모양이 표준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숙만 주판알을 잘 못 튕긴 게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은 미진이도 매번 주판을 건드려서 나와 같이 퇴근하곤 했는데 끝까지 버티더니, 정년퇴직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아, 속 쓰리다. 어쩌다 난 주판알을 심하게 튕기는 남자와 결혼해서 빠듯한 생활비에 외식으로 순대국밥도 못 사 먹는 신세가 되었을까. 비 오는 날엔 순대국밥에 소주가 최고라며, 비 오는 날마다 날 부르던 현주가 생각난다. 현주야, 난 오늘도 소주를 마시기 위해 제육볶음에 넣을 재료라며 그것을 위장했단다. 여군인 보라는 걸핏하면 야외취침을 하더니만 이제는 캠핑 제품을 파는 사장이 되었다. 오늘따라 친구들이 보고 싶다.
힘들더라도 직장에서 버텨야 했다. 경숙은 아직은 펼쳐보지 못한 욕구들을 누른 채, 알뜰한 주부로 살아야 했다. 첫딸인 하나를 낳은 건, 그나마 그녀에게 다행이었다. 드디어 남편의 월급 통장을 내가 맡게 되었다. 딸을 낳아준 남편의 선물이래나 뭐래나. 경숙은 하나를 완벽하게 키우고 싶었다. 한글 공부도 다른 아이보다 일찍 시작했고, 글이 트이자마자 책을 읽게 했으며, 수세기를 시작했고, 줄 긋기를 알려줬다. 길거리에 나서면 호기심 가득한 딸에게 고작 간판에 쓰인 글자를 물었다. 하나는 고등학교까지 자신의 화장품, 속옷을 사본 적이 없었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하라고 했다. 하나의 진로는 엄마에 의해서 이미 설계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엄마가 사준 옷이 마음에 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친구들이 하나에게 마음에 든 것을 골라보라고 할 때, 엄마를 부르고 싶다. 엄마, 난 무엇을 좋아할까.
세 정거장을 거쳐서 5년째 살고 있는 집에 도착했다. 엄마 덕분에 하나의 삶은 단순하다.
취미, 술, 운동 모두 엑스!
해가 짧아졌다. 라디오에서 때 이른 캐럴송이 나오기도 했다. 올 해가 가기 전에 건강검진을 해야 하는데, 무던한 하나도 걱정이 드는 중년의 몸이다. 버스 대신 집까지 걸어가자. 늦가을 저녁 공기 냄새가 달달했다. 좀 빠르게 걸어볼까. 집 근처에 다다를 때엔 땀이 났다. 이유 모를 웃음이 새어났다. 집 앞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아서 새는 웃음을 음미했다. 맞은편에서 남자가 걸어온다. 하나의 아빠처럼 그 남자 또한 에로스 화살에 맞고 말았다. 땀 맺힌 하나의 얼굴은 주황빛 아래에서 빛나보였다. 살짝 드러낸 하나의 하얀 윗니는 그를 습관적으로 그 자리를 오게 됐으니, 그녀는 그는 어떻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