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호두알 같은 여덟 살들에게

가을에 쓰는 편지

by 게으른 산책가



지금은 여름일까, 가을일까?

점심시간에 더욱 힘차게 뛰어다니는 너희를 보니 가을 같고, 교실에서 노는 데도 땀방울이 맺힌 지완이 얼굴을 보면, 손톱 끝의 봉숭아 끝물 같은 여름이 남아있는 듯해. 여름이 힘을 잃어가는 지금, 너희의 목소리는 더 단단해지고 있구나. 산책길에서 본 호두 열매는 여름이 끝날 때쯤 되면, 검은 점이 박힌 초록 껍질 속에서 단단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돼. 초여름에는 맡을 수 없던 향이 이맘때 나는데, 제법 많은 여름을 보낸 선생님은 그걸 구별하게 되었단다. 너희에게서도 그런 호두알 향기가 나.

선생님은 돌봄 교실에 근무하면서 한 번도 여덟 살과 함께 한 적이 없었어. 아홉 살과 겨우 한 살 차이인데 [아이들의 세계]가 별반 다르겠냐 싶기도 했지만, 처음 학교에 들어온 너희가 유리알처럼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야. 변덕스러운 바람이 불던 3월, 옷을 단단히 여미고 왔던 너희들은 겉옷만 여민 게 아니더구나. 너희가 내게 보낸 눈빛은 내가 하는 말에 마침표를 찍고서도 깜빡거리고 있었어. 덜 충전된 가전제품이 내는 불빛 신호 같기도 했지. 어쩔 수 없이 나는 했던 말을 또 했고, 또 했어. 목소리가 쉬는 게 잘 모르던 나인데, 퇴근할 쯤엔 목이 아프더구나. 그럼에도 나는 기뻤어. 오로지 나를 향한 눈빛과 귀 기울이는 너희가 있어서야.

화장실 가는 게 익숙해지고, 도서관에서 읽지도 않을 책을 몽땅 빌려다 놓을 때, 봄은 완연했어. 너희가 나를 “돌! 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게 제법 익숙해지고 소풍 도시락처럼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우리는 더 친해졌던 걸까. 여덟 살의 언어에 반할 때가 여러 번 있었어. 나는 마른 편이라 팔목도 가늘어서 뼈가 도드라졌는데, 혁이는 그런 내 뼈가 남달라 보였나 봐. 빤히 쳐다보더니 “선생님, 운동을 열심히 하셨어요”라고 했어. 마침 나는 아침마다 산책을 하던 중이라 내심 기뻤지. 어딘가에서 산책한 티가 났구나. 그 단서가 무엇일까.

“운동을 열심히 해서 선생님 뼈들이 튀어나온 거잖아요.” 그 정도는 충분히 안다는 표정으로 혁이가 말했을 때, 이런 순수한 언어를 눈앞에서 만끽하는 기쁨으로 가득했어.

지금은 9월, 아니 곧 10월이야. 남쪽 창문에서 북쪽 창문으로 드나드는 바람이 손으로 만져질 거 같지 않아? 가끔 나는 공상가가 되어서 너희에게 질문을 할 때, 한 번도 너희는 내 말을 걸러 듣지 않았어. 같이 공상가가 되어 대화가 이어지는 우리가 좋더라.

시월, 이름도 예쁜 달이지? 너희가 완연한 봄이 되었을 때, 학교를 자신 있게 누볐던 것처럼 시월이 되면 이제 익숙한 옷을 입듯, 즐기자고.

그리고 너희는 단단한 가을의 호두알이 되었을 테고.

2023년 9월, 여름인지 가을인지 헷갈리는 어느 날에 돌봄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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