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벌레

by 게으른 산책가

“둘 다 사슴벌레야? 한 마리는 몸이 까맣고, 다른 한 마리는 갈색 빛인데?”

“넓적사슴벌레와 톱 사슴벌레예요.”


내가 관심을 보이자 아홉 살 사슴벌레 애호가들은 내 주변으로 우르르 몰렸다. 사슴벌레와 장수하늘소가 매번 헷갈렸는데 오랜만에 자세히 들여다봤다. 별생각 없이 벌레라고 말했는데, 반짝이는 검은 등빛과 몸의 1/3을 차지하는 뿔을 보니 그것을 파리, 모기 취급한 데에 미안함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뒤집혀 있을 때 사람 손에 끌려 포로가 된 것도 억울한데, 사람 주변을 맴돌다가 한방에 죽음을 맞이하는 잔챙이 벌레 취급은 포로가 된 것보다 더 모멸감을 주었으리라. 단단한 갑옷과 바이킹 같은 투구를 쓰고서 나무 진액을 빨아먹던 사슴벌레는 곤충채집통에서 아이들이 준비한 젤리를 먹는 삶이 되었다. 개척자 같던 그것은 경쟁자도 없어 안전하지만 권태로운 울타리 속에서 노쇠한 장군이 되고 말았다. 머리, 가슴, 배 그리고 더듬이를 가진 곤충이라도 권태는 찾아왔다. 권태일 수도 있고 남은 삶을 대충 연명하려는 일종의 포기일 수도 있다.


가로 두 뼘, 세로 한 뼘인 세상에서 날개는 필요 없었다. 단단한 뿔을 써볼 기회는 없어서 그렇게 기운이 없었을까. 다큐멘터리나 책에서 들은 상식이 아니어도 그것에 잠시 이입하면 알 수 있다. 학교 닭장에서 자라는 닭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축이 된지도 2000년이 지났으니 그들끼리 그 안에서 사회를 이루는 게 그토록 자연스러울 것이다. 닭장을 당당히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고서 그 안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수컷은 눈을 번득이고 벼슬을 반듯하게 세운다. 그렇다. 내가 여덟 살 때 수탉에게 호되게 당한 적도 있었다. 가축이지만 당당했다. 언제 팽 당할지 모를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당당했다. 그에 비하면 사슴벌레는 상전이었다. 톱밥을 깔아주고 젤리는 무한정 제공되었으며, 절대 적군은 들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단단한 갑옷이 사랑스러워서 눈으로만 두고 볼 수 없다. 36.5도 온기로 자꾸만 쓰다듬고 싶다. 밤낮에도 온도차는 느낄 수 없는 그곳에서 자꾸만 힘을 잃어갔다. 느릿한 사슴벌레의 동작에 아이들은 말한다.


“얘는 순하고요(뭐라고? 곧 죽을 거 같은데?), 얘는 성격이 급해요(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너는 부디 탈출하길 바라.).”

“너희는 보기만 해도 애들을 알 수 있어?”

“네, 배고픈 것도 알 수 있고, 욕심이 많은 것도 알 수 있어요.”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잠깐 들여다보는 곤충이지만 그것들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톱밥 속에서 안전한데 얼마나 아늑할까, 아이들은 그것들의 보호자로서 뿌듯하다.


사슴벌레의 풋내 나는 보호자들을 보니 어린 엄마 시절의 나도 떠올랐다. 큰딸이 내딛는 모든 곳에 보호막을 두르고 싶었던 나였다.

‘손에 흙이 묻으면 기생충 알이 붙을지 몰라. 일회용 기저귀보다 천 기저귀를 해야지.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외출한 사이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투명한 곤충 채집통에 있는 사슴벌레를 들여다보는 아이들처럼 난 큰딸의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정말 다행인 건 큰딸 뒤로 두 명의 딸이 더 있었기에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것은 불가능해진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내 체력이 고갈되어 그녀들을 적당히 키울 수 있어서. 애는 힘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키우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사슴벌레를 보며 나를 떠올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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