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도 빠짐없이 초여름 밤은 달콤하다.
한 낮동안 팔뚝과 얼굴엔 자잘한 결정체가 붙어있다. 꽈배기에 붙은 설탕이라고 말하면, 너무 부앙 부앙(전라도 사투리)하다고 하려나.
어스름이 내려온 때부터 달콤하다. 아직 초여름이라서 그렇고, 23년 전 초여름이 떠올라서 그렇다. 그 사람과 내가 둘이 간직하고 있는 23년 차 여름밤 향기.
하필 ‘밤’ 향기이다. 연애라는 걸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숙맥에게 초임 경찰이 다가왔다. 그도 연애 경험이 없는지 내 눈에도 보이도록 동료 경찰이 수군대면 바로 튕겨 나와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별 말은 아니었다. 인사 한 마디 하려고, 나에게 튕겨 나왔다가 다시 머쓱하게 파출소로 들어간다.
낯선 경험이 거북한 건지, 난 그 후로 다른 길로 돌아서 다녔다. 눈에 띄지 않는 걸 알고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난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두근대서? 아니다. 아빠가 고명딸에게 가르치는 대목에서 남자의 위험성에 대해 강조를 했던 터라 전화 통화하는 것만으로도 꾸중을 들을 거 같았다.
“저희 집은 9시 이후로는 못 나갑니다. 그러니깐 전화하지 마세요.”
물론 저녁에는 한가하지만, 우리 동네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한 번만 들켜도 바로 아빠에게 전해질 텐데. 아빠 핑계만 될 것은 아닌 게 엄마가 돌아가신 뒤, 나는 상당히 무기력한 상태였다. 동네에 있는 신협에 다니고 있던 난, 퇴근할 때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 여가를 영화로 때웠다. 조용한 시골에서 무기력할 때 할 수 있는 건 내가 하지 않던 것들이었다. 오래된 영화보기, 독서, 클래식 듣기.... 모두 내가 안 하던 짓이다. 오로지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 나에게 자꾸만 얼굴을 들이대는 정순경 님은 집요했다. 수시로 내 직장에 순찰을 왔다. 순찰은 금융기관을 보호하고자 오는 게 아니었다. 내게 애인이 있는지 여부를 알려는 순찰이다. 그는 몇 개의 키워드의 질의응답을 통해 애인이 없음을 알아내고 더 적극적이었다. 눈이 오는 날에 멀리 내가 보이면 굳이 내가 걸을 길을 쓸고 있었다. 아 부담스러워라.
내 성향을 파악했는지 정순경 님은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다. 일대 일로는 절대 만날 수없다는 걸 알고서 내 친구와 나를 같이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만나면서 점점 불편한 감정이 사라질 때쯤, 정순경 님과 난 둘이 만나기 시작했다. 겨울 2월 23일에 시작해서 여름쯤 되었을 때, 우린 연인이 되었다. 지금 살고 있는 연립주택 아래에 있는 천변을 많이 걸었다. 그것도 한밤중에만 걸어야 했다. 연애를 한다는 건 여전히 아빠에겐 죄책감이 들었다. 초여름 밤에는 손을 잡아도 덥지 않았고 어두운 밤이라 그 감각이 집중되었다. 소쩍새 소리는 우리가 드라마 주인공으로 느끼게 해 줬다. 건너편 산에서는 한껏 기공이 열렸는지 푸른 냄새가 날아왔다. 겁이 많은 난, 핏줄이 도드라진 정순경 님과 함께라면 어둠도 무섭지 않았다.
무기력 인지도 모른 채, 집에 박혀 있는 게 내 성향이었다고 오해했다. 그 뒤로 주말마다 여행을 떠났으니 말이다. 전골을 먹을 때면 난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 정순경 님이 떠줄 때까지 말이다.
아직도 초여름 향기는 달콤하다. 기억력이 좋지 않다지만, 23년 전 여름밤부터 정순경 님은 나를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해 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