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도 없이, 헤어 곱창 밴드 없이
이젠 시간만 있다면 아무 때나 산책을 한다 해도 쾌적할 날씨다. 새벽이 아니면 안 되었던 여름날이었다. 늦게 잔 날이면 다음날 기상이 걱정되어서 아예 산책 복장으로 잤던 여름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더 고백하자면 잠에 취해서 바지도 앞뒤가 바뀐 채 나설 때도 있었다. 안경을 두고 나서서 걷는 내내 비몽사몽 보이는 풍광에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던 날도 있었지.
그런 날들이 있어서 지금은 산책이 내 일상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피나는 노력까진 아니어도 ‘어리바리, 좌충우돌’ 정도는 겪고 나야 다짐이 실행으로 가는 게 쉬워진다.
책을 읽다가 늦게 잠들었다. 그래서 아침 산책은 틀렸지, 생각하며 잤더니 그렇게 되어 버렸다. 사실 7시에 일어났을 때 나서도 되었지만, 이미 내게 스스로 단정을 한 탓에 내 의지는 딱 고만큼 움직였다.
9시 40분, 다른 날보다 늦은 산책이지만 날씨는 아침 7시와 다르지 않았다. 반바지 차림이 후회될 뻔했다. 안경도 쓰지 않고 머리는 풀어헤치고 나섰다. 시골길이라 마스크도 하지 않았다. 만약 반바지 밴드가 아니었다면 내 해방감은 극에 달했겠지. 극에 달하지 않도록, 밴드가 잘 잡아줘서 다행이다.
바람에 날릴 수 있는 것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날렸다. 물론 내 머리칼도 날렸다. 머리가 더 길다면 휘날리는 모양을 볼 수 있을 텐데. 아니다. 볼 수 없어서 나는 더 아름답게 상상하고 있었다. 물결 모양으로 날리는 내 머리칼은 상상 속에서 매력적이었다. 그러고 말았어야 했는데, 굳이 확인해 버리고 말았다.
이 빗자루는 뭐여?
상상만 하고 말걸.
키가 커버린 풀은 바람 세기마다 다른 동작을 보여줬다. 그리고 바람이 내 팔을 스칠 때는 닭살을 세웠다. 이건 바람의 지문인가? 오, 바람의 지문 좋아.
하지만 내 머리칼을 보고선 확 깼다. 지문이고 나발이고.
비 온다. 바람이 비를 몰고 온 것이다. 바람의 지문이고 나발이고 난 화난 사람처럼 발을 떼내며 걸었다.
농약 하러 가시던 친구 엄마는 비가 오든 말든 페달을 밟고 내려가셨다.
성난 걸음으로 걷다가 긴 의자 옆에 느티나무까지 심어둔 걸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내 마당에 누군가 선물을 준 것만 같아. 그나저나 비가 더 많이 온다. 다시 성난 걸음으로 집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