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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산책가 Sep 24. 2021

우체국에서 생긴 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그것

이른 아침부터 읍내 볼일을 마치고 동네에 있는 우체국에 들렀다. 종종 보일러를 틀어야 하는, 이름도 예쁜 ‘가을’, 큰딸은 기숙사에 가을 옷을 부쳐둬야겠다며 택배 박스를 샀다.


가장자리로 차 두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난 가운데에 주차하기로 마음먹었다. 후방 주차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했다. 딸이 박스를 사 오는 동안, 차 안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 사이, 왼쪽 가장자리에 주차한 경차 주인이 노모와 함께 차를 탔다. 그리고 바로 딸도 나와서 시동을 걸고 후진을 할 찰나였다. 후방 센서에서 소리가 들렸다.

“띠띠띠띠…”

그리고 격앙된 남자 목소리도 들렸다. 후진하는데 위험 요소가 있어서 제지하는 건가?  후진 모드를 ‘P’ 모드로 바꾸고 창문을 내렸다.


무슨 일이세요?”

내 차 백밀러를 받았구먼. 아무렇지 않았는데, 방금 이렇게 된 거 보니깐.”

에!”

예’도 아니고 ‘에’라는 감탄사가 나왔다. 어이없을 때 나오는 이 소리엔 입 모양이 얌전하지 않다. ‘엥, 뭐시라고라?’ 이 말이 생략된 것이다. 더 붙이자면, ‘이 냥반아, 지금 뭐라는 겨?’도 속마음에서는 들끓었다.


아저씨, 차 간격이 이렇게 많이 벌어져 있었는데 무슨 말이세요?”

차 주인의 논리는 단순했다. 아침에는 멀쩡했고, 주차장에 주차하고 지금 백밀러에 문제가 생겼으니 당신 차가 박았다, 이런 식의 논리였다. 본인이 업무를 보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딸이 박스를 사는 동안 불과 5분도 안된 시간에 용의자가 된 것이다.


난 ‘오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오죽하면 드라마를 보다가도 ‘오해’당한 장면을 보면 티브이를 꺼버리겠는가. 이 증세는 좀 오래됐다. 기억이 안 날 뻔했는데, 친구 말이 떠올라서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 친구 집에서 잠을 잤다. 같이 드라마를 봤나 보다. 드라마에서 오해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지 그날도 있었다. 우리 집이 아니니 난 친구에게 부탁을 했나 보다.

야, 너 때문에 나도 이제 이런 장면 보는 게 힘들어졌잖아.”


그런 내가 ‘용의자’가 됐다. 오전 10시도 안된 하루의 시작이 용의자라니. 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우체국으로 들어갔다. 차주인은 우체국장에게 CCTV를 보여달라고 했다. 난 더 적극적으로 말했다.

어서 보여주세요. 저도 보고 가야겠어요. 오해받는 거 딱 질색이니까 당장요.”

차주인은 내 태도에 대해서 자신의 행동을 항변했다.

그렇잖아요. 멀쩡한 백밀러에 이상이 생기니까 물어볼 수도 있는 거죠.”

아니, 아저씨가 제게 흥분하며 말하셨잖아요. 저는 오해받기 싫으니까 보고 가야겠어요.”

난 어서 영상을 보고 나머지 화난 부분을 이 차주인에게 풀고 싶었다. 무심코 의심하고 화를 냈으면서 도리어 내게 흥분한 자신을 이해할 수 있지 않냐고 말하다니. 우체국에는 내가 아는 손님도 계셨다. 굳이 내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셨다.

아이, 저 양반 신랑이 순경이여. 어서 집에 가.”

나를 구제해준답시고 집에 가라고 했다. 난 끝까지 남아서 내 안의 분노를 덜어버리려고 했는데….


찝찝했다. 그 차주인은 내차를 찍었는데, 난 한 일이 없다. 그냥 용의자에서 풀어나면 끝인 상황이다. 1미터 떨어진 자리에 주차한 죄뿐인데.


터덜터덜 집으로 왔고, 신랑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왜 상대방 차 사진을 안 찍었냐고 꾸중을 들었다. 내가 그것까지 해야 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좀 이해가 안 된다. 조수석 백밀러 상태를 어떻게 매번 파악을 하고 사는지 말이다. 그 차는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차 색깔도 짙은 재색이었으니 흠집이 나도 모를만했는데, 그에 비하면 내차는 도색 상태가 매끄러워서 부딪히면 바로 티가 난다. 내 차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인데, 백밀러로 여차해서 요행을 바랐나 싶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다른 것도 자리 잡았다. 우체국에서는 영상을 보여줄 수 없으니 경찰서에 먼저 알리라고 했다. 난 분명 부딪히지 않았는데 묘하게 오해받을 각이 나오면 어쩌지. 세상은 죄가 없어도 죄가 만들어지기도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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