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과 가족

40대의 어설픈 김장 일지

by 게으른 산책가

‘김장’이라는 단어는 무거운 맛이 있다. 혼자를 위해 김장을 하지는 않는다. 나를 뺀 나머지 구성원을 위해 ‘해야만 하는’, 김치냉장고에 저축해야 해둬야 하는 이맘때의 일거리이다.


시골 어르신들의 김장은 배추 모종을 기르는 과정부터 시작된다. 유독 가물었던 올 가을은 어르신들의 배추밭 드나드는 일이 잦게 만들었다. 속이 노랗고 꽉 찬 배추밭도 있지만, 겉잎이 누렇게 타들어간 배추밭도 있다. 시골의 농사 성적표는 오가는 행인들의 마음속에서 매겨진다.


김장의 주재료 두 가지를 뽑는다면, 배추와 고춧가루다. 주재료이건 부재료이건 모두 사야 하는 나로서는 올여름이 야속하다. 습기 가득하던 여름은 많은 고추를 병들게 했다. 늦여름 새벽 산책길에서 텅 비어있는 고추밭을 보았다. 여름내 정성을 쏟던 그곳은 금세 비워졌고, 배추가 심어졌다. 현명한 농사꾼은 속상해할 겨를에 배추를 부지런히 길러냈다. 고추 농사가 망해서 사 먹어야 하지만 배추를 심어서 팔면 고춧가루 값을 벌 수 있다. 농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고, 때를 놓치면 안 된다.


11월 둘째 주는 가을로써 매력이 넘치는 날이다. 아직 가을 옷을 입기에 적당하고, 아직 나무에는 잎이 붙어있으니 말이다. 첫째 주에 우리 가족에게 말했다. 둘째 주는 김장을 하니, 다들 시간을 비워두라고. 아예 ‘11월 둘째 주’ 매력을 생각하지도 못하도록 미연에 초를 친 것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엔 김장은 호기심이었고 놀이이었다. 지금의 김장은 집안일에 일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행사’가 됐다. 제법 도움이 되고 있다. 우리 집안의 주부로서 조금 나은 것이지, 나는 살림을 잘 못한다. 가끔은 신랑이 더 잘하는 거 같아 든든하다(사실 몇 가지는 신랑만 하는 집안일이 있다). 30대 초에는 얼른 나이가 먹고 싶었다. 육아에서 해방되고 집에 묶어있는 나의 시간이 조금은 느슨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걱정되는 한 가지가 있다면, 40대가 되어도 음식도 못하고 김치도 못 담그는 부족한 어른이 되면 것이다. 40대가 되었고, 30대와 달라진 게 있다면, 더 느긋해진 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았다고 걱정할 것도 아니었다. 나의 부족한 것이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느긋해진 나를 닮아가는 아이들과 나의 신랑이다. 엄마의 태도는 분위기를 만드는 축이 된다. 내가 부족하니 아이들과 신랑은 모든 걸 나에게 맡기지 않는다. 내가 부족해서 가족에게 도움을 받는 모양새 일수도 있고, 안 하면 두고두고 잔소리를 들을까 봐 몇 시간을 나눠주는지도 모르겠다.


절임배추 40kg, 동네 할머니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 양이지만, 우리 집에서는 가을 행사이다. 매해 레시피를 찾아서 검색창에 ‘절임배추 40kg’를 친다. 첫 번째로 뜨는 블로거로 대충 정한다. 40kg에 맞는 재료 양만 알아두면 된다. 하지만 양념이 완성되면, 그 블로거를 원망한다.


“왜 이리 부족해 보이지?”


욕심부리며 새빨갛게 양념을 바르려던 올 해의 계획은 또 실패다. 나는 바닥에 깔리는 배추는 양념을 적게 바르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부쩍 집안일을 해오던 신랑은 내 지시와 다르게 빨갛게 바르고 있었다. 큰딸은 김장은 처음이라 시킨 데로 하고 있었다. 신랑은 내 시야에 두지 않았다. 그는 지시를 받을 계급이 아니라 여겼나? 양념이 팍팍 사라지고 나서야 신랑이 양념한 김치통에 시선이 갔다. 나는 옆에서 양념이 부족할까 봐 전전긍긍하는데도 배포가 두둑한 신랑을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반쪽의 배포가 있어서 나의 느긋함이 더 완전해지는 걸까? 스릴 넘치게도 양념과 배추는 딱 맞아떨어졌다. 음, 나와 큰딸의 절약 덕분일 수도 있겠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둘째는 많은 설거지를 하기로 했으니, 김장이 더 만만하게 느껴진다. 막내는 열심히 학교 과제를 하였고, 김장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맛있다는 ‘립서비스’가 훌륭했다. 김치 냉장고의 한 칸을 채우고 나머지 한 칸은 절반을 채웠다. 김장을 하자마자 ‘종가집’ 김치는 다 볶아 먹었다. 김치 과소비를 할 수 있어 좋다.



2020. 11. 16 김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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